▲ 기아노동자 박덕제. ⓒ뉴스Q

4. 노동운동의 탄생기(90년 ~ 96년 이전)

1990년 6월 최초의 현장 활동가 조직인 ‘기아자동차 민주노동자회’(약칭 민노회)를 결성하고 해고자복직과 현장사업의 조직적 활동에 나서게 된다. 이와는 별도로 상용 조립라인의 자생적인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대의원들이 개별적인 활동의 한계를 인지하고 1990년 중순 ‘기아자동차 노동자 투쟁위원회’(약칭 기노투)를 결성하게 된다.

허관무 집행부는 1990년 임금협상 과정에서 위원장 직권조인으로 임금협상안이 결정되어 버리자 민노회의 활동방식에 반감을 가진 진보계파내의 현장 활동가들이 ‘기아자동차 민주노동자실천위원회’(약칭 민실)이라고 하는 새로운 계파를 결성하였다. 1991년 6월 허관무 집행부의 2년간 직권조인에 분개한 활동가와 조합원들이 6일간의 투쟁을 진행한다. 이 투쟁이 기아 노동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른바 6.28투쟁이다.

6.28투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허관무 집행부의 2년간 직권 조인이며, 투쟁의 요구 사항은 임금 재협상, 단협 이행,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투쟁결과 임금 7,000원 인상이 되었고, 해고된 조준호·정형기 회사출입허용 및 추후 부서배치, 민형사상 책임 묻지 않는다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자본과 정권은 노사합의가 사측(사장)이 감금된 상태에서 진행된 것이므로 무효화를 선언하고 핵심 활동가를 구속 수배 및 해고를 단행했다.

열성조합원들이 구속 또는 해고된 상태에서 1991년 8월 위원장 선거에서 호남 향우회의 지지를 근거로 김관태 후보가 당선이 되었다. 김관태 집행부는 초기에 원칙적인 강경 투쟁 의지를 표명하고 구속자 석방, 직권 면직자 복직 등을 요구하였으나 점차 투쟁의 수위를 낮추어 갔으며, 특히 해고자 복직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1993년 임단협에 들어가면서 ‘임금동결철회대책위원회’를 결성할 당시 노민추 의장이었던 이재남이 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노조의 임금동결을 철회시키고, 해고자 복직 및 임금인상 성과를 거두었다.

1992년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약칭 노민추)가 결성이 되고, 11대 김관태 집행부에 참여했던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1993년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실리주의적 노선의 현장조직을 결성한다. 12대 위원장 선거 이후 향우회 등 지역모임의 영향력이 급속히 저하되고, 변혁적 노동운동 세력이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12대 위원장 당선된 민주세력은 1994년 6월 대의원대회를 통해 한국노총 탈퇴를 결의하고 1995년 민주노총에 가입하면서 이전까지 집행부와는 차별화된 노선을 보여주게 된다. 1995년 9월 13대 임원선거를 앞두고 거의 노민추 조직으로 선거를 치르기 어렵다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노민추는 1995년 5월 ‘전진하는 민주노동자회’(약칭 전민회)라는 새로운 조직으로 재탄생 된다. 13대 후보를 선출하는 전민회 내부 경선은 민노회, 민실노, 중도파 등 3파간의 격전정이 되었고, 결국 민노회 이재승 후보가 위원장 후보로 선출되었다.

1996년 민주노총 산하 연맹 가운데 전국 최초로 기아자동차노동조합이 노동법 개악 투쟁을 시작했다. 노동법개악 투쟁은 해방이후 가장 강력한 노동자들의 정치 투쟁으로 정권을 굴복 시켰으나, 정치세력화와 내부적 단결의 부재로 비정규직 양산과 대량해고를 막지는 못하였다. 1997년에 불어 닥친 IMF경제위기(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통화기금)와 기아부도는 기아 노동운동의 전환점이 된다.

5. 이념적 분화기(1996년 ~ 2003년)

13대 임원선거를 치르면서 내부 진통을 겪은 전민회는 1996년 1월 ‘기아자동차 민주노동자회’(약칭 기노회)와 11월 ‘평등세상을 여는 노동자회’(약칭 평등회)를 결성하게 된다. 기노회가 선배 활동가를 중심으로 기업 내부의 자생적인 활동에 중심을 두었던 것에 비해 평등회에는 외부 단체들과 연계된 젊은 활동가들이 주를 이루었다.

평등회의 결성은 기아자동차 내 최초의 현장조직의 분화였으며, 조직 분리의 결정적 배경은 정치노선상의 차이에 있다. 평등회는 PD(People’s Democratic 민중민주, 사회주의 계급혁명)노선에 가까운 세력이었으며, 이들 내부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이들이 분리된 후 기노회는 자연스럽게 NL(National Liberty 민족해방론, 자주민주통일)노선의 성향이 강해졌다.

1997년 기아자동차의 부도사태는 위기 상황 속에서 치러진 14대 임원선거는 평등회, 기노회, 충청향우회, 전라향우회 4팀이 후보를 내걸었으나 고용안정투쟁을 내세운 평등회 고종환 후보가 당선되었다. 15대 임원선거에서는 기노회, 평등회, 미래노(미래를 여는 노동자회) 등이 후보를 내걸었으나 기노회 신승철 후보가 당선되었다.

2000년 들어서면서 기아자동차에 4개 노동조합이 통합되면서 노조는 규약을 통합해 러닝메이트(동반출마)제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선거제도는 개별공장 차원의 현장 조직들 간의 통합을 촉진하였다. 기아자동차 내 노동운동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기아자동차 민주노동자회’(약칭 기노회)와 ‘평등세상을 여는 노동자회’(약칭 평등회)는 각각 광주공장, 화성공장의 자생적인 현장조직을 통합하여 전국단위의 현장조직인 통합 기노회(2000년)와 ‘현장의 힘으로 노동해방을 여는 노동자회’(약칭 현장의 힘, 2001)로 다시 태어났다.

16대 임원선거는 4개사가 통합한 후 처음으로 실시된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기아자동차 현장조직 중 전국조직으로 전환에 성공한 핵심 조직들만 참가하였다. 현장의 힘 하상수 후보, 기노회 정형기 후보, 미래노의 박홍귀 후보가 나섰으나, 기노회 정형기 후보를 제치고 현장의 힘 하상수 후보가 당선되었다.

16대 집행부는 상집간부가 조합원의 건강검진병원지정 과정에서 금품수수 등의 비리문제로 1년 6개월 만에 2003년 임투를 앞두고 중도에 총사퇴를 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17대 임원선거에는 현장이 힘이 불참 선언을 하고 출마하지 않게 되자 기노회 내에서 경쟁이 심해졌다. 

[차 례]
1. 기아자동차 노동조합 설립 및 전개과정
2. 노조창립에서 84년 말까지(노동운동의 암흑기)
3. 노동운동의 준비기(84년 ~ 90년 이전)
4. 노동운동의 탄생기(90년 ~ 96년 이전)
5. 이념적 분화기(1996년 ~ 2003년)

6. 권력 지향적 분화기(2003년 ~ 2012년)
7. 권력 지향적 통합기(2012년 이후 ~ 현재)
8. 기아자동차 노동운동의 특징
9. 기아자동차 노동운동의 과제와 방향   

 

기아노동자 박덕제

전 민주노동당 화성시위원회 위원장
전 금속노동조합 기아자동차지부 정책실장

 

*<뉴스Q>에서는 글의 분량이 너무 많아 조금씩 나누어, 앞으로 4주에 걸쳐 아래와 같이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1주차: 7월 31일(월) [차례 1, 2, 3]
2주차: 8월 7일(월) [차례 4, 5]
3주차: 8월 14일(월) [차례 6, 7]
4주차: 8월 21일(월) [차례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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