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현희 작가

“박현희 작가가 누구예요?”
“오~, 누가 이런 멋진...!”

가끔, <뉴스Q>에 연재되고 있는 만평 ‘박현희의 Q한민국’을 보고 물어오는 독자들의 궁금함이다. 그럴 때마다 “그런 작가가 있어요!”라고 슬쩍 넘어가거나 그냥 한번 ‘씩’ 웃어주고는 했다. 박현희 작가를 여기저기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름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나 이제, 어쩔 수 없이 그때가 다가오고야 말았다. 박 작가를 세상에 공개할 때가 말이다. 박 작가와 <뉴스Q>는 오는 7월 4(화)일부터 10일(월)까지 1주일 동안 수원시 팔달구 행궁길갤러리에서 그동안 연재했던 만평들을 모아 원화 전시회를 연다. 전시회장에 들르면 자연스레 박 작가를 만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전시회 준비 점검도 할 겸 16일 오후 박 작가를 수원청년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박 작가는 경기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같은 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미술교육을 배우고 있다. 1992년생, 청년작가들의 모임 ‘혜윰’ 창립 멤버이자 현 회장이다.

인사동 갤러리i 그룹전, 문경새재 옛길박물관 초대전 ‘청년작가 혜윰 展’, 문경 문화예술회관 ‘청년작가 혜윰 전’, KAUGGE 전국미술대학(원)연합 졸업작품전(학여울역 setec), 청년작가 기획전(수원 해움미술관)에 참여했다. 온라인 <불교신문>에 연재소설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림 그리는 재주를 가지고 사회활동에도 열심이다. ‘벽그림봉사단 비루빡’ 부회장, 수원청년회 벽화봉사반 ‘두드림’ 벽화반장을 맡은 바 있다. 수원청년회 소모임 ‘꿈 그리다’ 미술반과 ‘예인살롱’, 칠보산 학교 공부방 미술반을 운영하기도 했다.

▲ 박현희 작가. ⓒ뉴스Q

<뉴스Q> 만평 연재 제안을 덥석(?) 물은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박 작가의 말마따나 “만평은 70~80대 화백이나 그리는 건데....”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가 온다지만, 준비되지는 못했어도 매사에 욕심이 있는 거죠. 제가 아는 만평은 70~80대 화백이나 그리는 건데, ‘내가 그릴 수 있을까? 내가 무슨 의식이 있고 철학이 있어서? 내가 어떻게 이런 제안을 받을 수가 있지?’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이런 제안을 받은 것 자체가 영광이었고 좋았죠. 잘 해내든 못 해내든 그게 컸어요.”

박 작가는 생경하기도 했지만 개척해보고 싶은 욕심이 났단다. 그리고....

“일하고 알바하고, 제가 그림을 안 그리고 있는 거예요.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1주일에 한 번 만평이라도 그려야겠다’ ‘붓을 들어야겠다’ ‘뭔가 종이에 그려내야겠다’, 이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더는 제가 그림을 안 그리게 될까봐.”

젊은이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현실이, 아니 현실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이, 두려웠을까? 그렇게 박 작가는 만평의 세계로 성큼 한발을 내딛었다.

“제가 관심이 있었던 내용이든 없었던 내용이든, 모든 것에 대해 치열한 내적 고민이 수반됐어요. 심각할 정도로 자신을 이입했죠. 밤잠을 설쳤어요. 결과적으로 의식 향상에 도움이 됐던 거 같아요. 그런 게 가장 좋았어요.”

박 작가는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게 다 아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튼 이런 작가의 치열한 고뇌에도 마감시한은 1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찾아왔다.

“제가 그림을 그리면 하염없거든요. 제가 결론을 지어야 되고, 더 고민이 안 돼 못 그리겠어도 1주일에 하나는 나와야 되니까요. 좋으면서, 만평을 선택한 이유면서도 고통스러웠죠. 스스로 타협하는 기분이 들 때는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그렇게 만평 ‘박현희의 Q한민국’은 하나하나 쌓여갔다. 그래서 만평마다에는 그의 고민이 짙게 배어 있다. 그의 만평만의 특징은 무엇일까?

“만평 중에 세월호가 떠오르는 것을 그린 만평이 있어요. 눈 모양에서 피가 흐르는.... 갑자기 그린 거예요, 그냥. 그 작품을 가장 아껴요. 주위에선 피가 빨갛게 흐르고 무섭다고도 해요. 바다는 살짝 파랗게 입혀서 분위기 좋게 표현하는 게 좋지 않느냐고. 하지만, 정말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잘 못하지만 그러고자 노력해요. 강렬한 충격과 절망, 그런 것들을 외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죽지 않을 정도만, 그런 정도는 바라봐야죠. 저는 어떤 고통을 직시하는, 그런 작품들이 좀 기억에 남아요.”

박 작가가 사회활동에 참여하게 된 것도 세월호 참사 때문이었다.

“제 또래는 다 그런 거 같아요. 오보가 난 것에 대한 엄청난 충격! 대학교 수업 중간에 땡땡이 치고 캠퍼스를 돌아다니면서 놀고 있었어요. 다 구했다는 거예요. 몇 백 명이 죽었는데 말이죠. 어떻게 세상에 이런 얘기가 나오지? 사회문제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모르다가 ‘누군가도 하루아침에 죽을 수가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죠. 아버지가 19살에 돌아가셨는데도 그냥 살았거든요.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서야 죽음이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마주하게 된 거죠. 그 후부터는 그런 것을 계속 생각했어요. 약간 어둡고, 그런 게 그림을 그릴 때에도 반영이 돼요. 수원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집회도 다녔어요. ‘양심수’라는 단어도 몰랐었죠.”

박 작가는 세월호가 떠오르는 그 순간, 오히려 “허무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만평의 특징을 한 가지 더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제가 엄마에게 만평을 보여주기만 하면 ‘서정적이야’라고 말씀하세요. ‘너는 너무 순진해!’라고요. 만평에 이런 게 많이 들어나죠. ‘투박하다’ ‘세련되지 못하다’, 제가 그리는 그림의 특징이기도 해요. 내용을 뭔가 그림화시킬 때도 되게 똑똑하게 그리는 능력은 없어요. 뭔가 코흘리개 같은, 산골의 그런 소년 같은 투박함? 그래도 손 그림으로 그려요. 요즘 손 그림으로 뭐 한다고 하면 다 놀라요.”

전시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전시회 한다는 생각까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이것도 내 그림이니까. 만평을 연재한 지 1년이 된 시점이기도 하고요. 혼자 하는 것은 처음이에요. 좀 뜻밖이기도 하지만 열심히,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라도 와서 봤으면 좋겠다. 아니 그냥 오다가다 들러주면 그만이다.

“만평을 보고 누군가는 ‘오~!’, 누군가는 ‘나왔나?’, 보통은 ‘올라왔나보다’ 하다가 조금 관심 있으면 눌러보거나 하겠죠. 하지만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뭔가 그 보이지 않는 곳에서 꾸준히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요. 당신이 생을 사는 동안에 누군가 이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허공에 떠도는 게 아니라, 이렇게 뇌리에 박히는 그림을 그리는,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이죠. 그게 어쩌면 사람들에게 놀라울 거 같아요.”

마지막으로, 박 작가는 “너무 자랑처럼, 너무 허세 부리는 것처럼 되지 않게 잘 써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이 이야기도 꼭 하고 싶다고.

“그런 말 많이 들어요. ‘현희는 미대 나왔잖아?’ 이런 말 정말 엄청 듣기 싫어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진짜 싸우고 싶을 정도예요. 제가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에 미대에 간 거지, 미대 나와서 그림을 잘 그린 것은 아니거든요. 제 남자친구도 미대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림을 잘 그려요. 학력이랑 전혀 상관없는 건데,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것은 엄청난 폭력이에요.”
 

저작권자 © 뉴스Q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