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아줌마의 평양 이야기’ 강연-8
‘평양 아줌마의 평양 이야기’ 강연이 지난 1월 17일 저녁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6.15수원본부,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 통일나눔이 공동 주최했다. 북 이탈주민으로 남에 오자마자 고향으로 송환을 요구 중인 평양주민 김련희 씨가 강사로 나섰다. 김 씨는 북에서 42년 동안 살았고 2011년부터 6년째 남에서 살고 있다. 북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남 사람들의 북에 대한 왜곡된 인식도 바로잡아 주었다. 일단 이야기가 정말 재밌고 한편으로 신기하기까지 했다. 단 한 편의 기사로 작성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강연 내용을 정리해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하나의 민족, 한 형제인 북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주]
‘평양 아줌마’ 김련희 씨는 부모님이 보고 싶어 “정말 가슴이 피 터지게 아픈 게 숨을 쉴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내가 엄마니까 딸이 제일 소중할 거 같잖아요? 아마 북에 두고 온 딸에 대해 물어보시는 거 같은데, 아니에요. 처음엔 생이별 당할 거라고 상상을 못했던 거잖아요. 생이별 당하니까 자식이 눈에 안 들어와요. 기억도 없어요. 정말 숨 막히고 정말 가슴이 피 터지게 아픈 게 부모더라고요. 정말 숨 쉴 수가 없어요. 나이 많으신 부모님이 날 기다리다가 마지막 순간에 나를 못보고 안타깝게 가시면 어쩌나! 마지막 임종을 지켜주지 못하면 어쩌나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더 힘들었고요. 딸 아이는 17살에 엄마와 헤어진 거잖아요. 내 마음도 이렇게 찢어지는데 딸 애가 얼마나 엄마가 보고픈 걸 견디어 나갈까? 그것 때문에 또 아파요. 어떤 사람이 ‘북에 가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어요. 저는 제일 먼저 가면 엄마 하고 시장 보고 엄마 앞에 앉아서 따뜻한 밥 받아먹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서도 김 씨는 자기보다도 더 오랫동안 생이별을 겪고 있는 장기수 선생님들을 걱정했다. 북에 있는 가족들과 계속 연락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지금은 ‘세상에 정말 나 같은 행운아가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해요. 여기 아직도 송환 못되신 비전향 장기수 분들 참 많아요. 그분들은 60여년 동안이나 자식들과 헤어져 계신 분들이잖아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도 모르고요. 저는 고작 5년을 헤어져있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고 아프다고 소리치고 있어요. 그분들한테 너무 죄송해요. 그분들은 아예 소식을 못 듣고 있지만 저는 계속 자유롭게 소식을 주고받고 있고 편지도 주고받고 선물도 주고받고 있어요. 국내에서는 뉴스에 얼마 안 나왔지만 외신에서는 엄청 나왔어요. 북을 방문한 분들은 한국에 와서 저를 인터뷰하고 동영상 찍어서 북에 전달하기도 해요. 부모님한테 선물 보낼 거 없냐고도 해요. 제가 작년에 머플러 사 가지고 수를 놔서 보냈어요. 딸이 ‘나 잘 받았어요. 겨울에 쓰고 춥지 않았어요. 어머니!’라고 인터뷰해서 공개적으로 올렸어요. 며칠 전에는 핀란드 유명한 감독님이 지난해 12월 18일부터 12월 23일까지 평양에 4박5일 동안 저희 가족과 같이 숙식하면서 다큐 영화를 촬영해 가지고 오셨어요. 요즘은 밤새 그거 보느라고 울곤 합니다. 항상 딸이랑 같이 소식을 자주 묻고 있어요.”
북에서의 김 씨 직업은 양복사였다.
“저는 북의 양복사였어요. 남쪽에선 패션디자이너하면 패션만 디자인해요. 하지만 북의 양복사는 패션디자인을 해서 몸을 재서 재단을 해서 봉재해서 입히는 것까지 끝내야 해요. 양복사들이 혼자 다해요. 제가 처음에 남에 와서 양복을 하는 사람인데 어디 가야 되냐? 그랬더니 대구가 섬유도시래요. 속았죠! 가보니까 대구는 섬유도시가 아니라 천연염색공단이더라고요. 솔직히 저는 서울에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암튼 그렇게 속아서 대구에 살게 됐어요.”
남에서도 헤어짐의 아픔이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졌다.
“남에 와서 알던 분들이 많았어요. 같이 탈북해서 온 분들도 있고 살면서 알았던 분들도 있고요. 근데 내가 세상에 탁 목소리를 내니까 그분들이 무서워서 다 몽땅 도망치고 멈췄어요. 국정원에서 자기들한테 영향이 올까봐. 이상하게 그 사람들이 끊어지면서 다른 탈북자들이 저한테 붙는 거예요. 전화를 해서 ‘누님, 저희들한테 희망을 안겨주세요!’ ‘누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누님이 길을 열어야 우리가 갈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저와 마음을 같이 하는 분들이 많이 친구가 된 거죠. 문자도 오고 위로도 해주고요. 탈북자들 중에 남에 살다가 못 살겠다고 다른 나라로 이민 가는 탈북자들도 많아요. 그분들은 외롭잖아요. 그분들은 막 말할 수 있으니까 전화나 문자가 와요. 찬양고무 같은 것도 막 하는 거죠.”
한때 김 씨는 국정원 직원들이나 경찰들의 극심한 미행에 시달려야 했다고 말했다.
“제가 작년 3월 7일 북에 가려고 베트남 대사관에 뛰어들었어요. 그러다 나왔는데 3달 정도는 한 걸음을 못 걸어가겠더라고요. 미행을 해서! 미행하게 되면 정말 바보도 아니고 눈치 채지 못하게 해야 되잖아요. 일부러 알라고 미행을 하더라고요. 겁을 주는 거예요. 6명~7명이 따라옵니다. 그것도 대놓고 따라와요. 식당에 가서 앉으면 옆에 식탁에 앉습니다. ‘식사 같이 합시다’ 그래요. 그러면 같이 먹은 식사 값까지 다 내더라고요. 어떤 때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서 눈물이 나와서 막 울고, 가다가 집으로 다시 뛰어 들어간 적도 있어요. 한참 그랬어요. 2달~3달을 그랬는데 못 참겠더라고요. ‘이대로 가다가는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다. 약해 보이니까 우습게 보는 거 같다. 센 척 하자!’ 한번은 서울에 있는 장기수 선생님들이 계신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골목에 숨어있다가 나와서 딱 붙어요. 분명히 관악경찰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악경찰서에 가서 사진하고 이름하고 다 있잖아요. ‘김아무개 나와!’ ‘왜 따라오냐! 스토커냐!’ 외쳤죠. 내가 누군지 아니까 깜짝 놀라더라고요. ‘당신네 민간인 사찰하는 거다. 민사소송 걸겠다’ 그랬더니 ‘민간인 사찰이 아니고 당신 감시하는 게 아니고. 당신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러더라고요. 그 일이 있고나선 경찰청에서 무슨 회의가 있었대요. 회의에서 ‘김련희를 밀착감시 하지 마라. 멀리 떨어져서 다니다가 놓치면 그대로 가만히 둬라’고 선포했다더군요. 지금은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