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가수-노래가 좋아 부르는 사람들

저 멀리서 흥겨운 트로트 노래가 흘러나오자
웃음을 잃은 노부부가 어깨춤을 들썩인다.
이 노래야말로 슬프고 울적한 마음을 달래는 명약이로고.

대개의 인간은 비틀거린다. 강한 강풍을 만나면 흔들리고, 소나기가 내리면 마른자리를 찾아 떠난다. 그러나 달과 같은 인간도 있다. 자신을 믿고 의지하며, 자신이 정한 궤도를 따라 걷는다. 그 마음이 너무도 확고해 어떠한 어려움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막연한 곳이 아니라 뚜렷한 목표를 향해 걸어가기 때문이다.

▲ 무명가수 강달님, 진성, 이상번.(왼쪽부터) ⓒ이동권

애절한 트로트 음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사라지는 기관차의 기적소리처럼 노랫가락이 구슬프다.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돈 벌러 방직공장으로 갔다. 그날은 벌거숭이가 된 아카시아 숲과 코스모스 꽃잎이 길가를 뒤덮었고, 밭 한 귀퉁이에 있던 할아버지의 묘지 군데군데가 추위에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마음이 울적해진 당신은 웅덩이가 파인 이랑을 건너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요즘도 마음이 쓸쓸해지거나 아들이 보고 싶으면 부르는 노래 ‘찔레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음악을 제일 좋아한다. 그래서 연예인 중에서도 ‘가수’를 좋아하며,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꿈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멋지고 예쁜 배우들은 한 번 보고 돌아서면 그만일 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친구가 되고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은 음악 밖에 없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도 트로트를 매우 좋아했다. 그 당시에는 록과 댄스 음악이 판을 쳤지만, 우울한 일을 겪으며 자라서인지 애절한 트로트 선율이 마음에 와 닿았다.

수척해진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해주기 위해 어두워진 거리를 나란히 걸으면서 부르던 그 시절 그 노래가 떠오른다.

▲ 강달님. ⓒ이동권
어떠한 시련에도 멈출 수 없는 노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무명’이라고 불리는 트로트 가수들을 만났다. 세상만사 힘든 일들이 겹겹이 뒤덮이고, 때 아닌 세파에 휩쓸리며 살아온 인생살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희끗희끗 눈물이 맺힌 눈언저리가 이를 말해준다.

무명가수들은 오직 노래만을 사랑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지나 지쳐 쓰러질 지경에 내몰리더라도 등잔불의 기름처럼 노래를 태우며 인생을 밝혀왔다. 긴 밤을 어지러운 조명에 몸을 맡겼고, 이슬이 내려앉은 새벽녘에 업소를 빠져나와 쓰디쓴 소주로 목을 적셨다. 그리고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쇠뭉치처럼 단단해진 허리와 다리를 눕혔다. 이곳저곳을 방랑하는 삶 가운데에서도 은빛 햇살 같은 새하얀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간혹 몸이 부르르 떨리는 슬픔이 찾아오더라도 언젠가는 저 꼭대기에 올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위로해주는 가수가 되겠노라고 인내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견딜 수 있다는 각오로.

노래 ‘사랑의 끈’으로 사랑의 상처에 가슴앓이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가수 ‘강달님’. 그녀는 아버지 얼굴을 모른다.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는 돈 벌러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홀로 집을 지켰고, 투정을 부릴만한 꾸지람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자랐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끌어야 할 이유도 없이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냈다. 노래에 열중하는 모습에서도 근심이 보이고, 자유분방한 성격에도 슬픔이 끊임없이 묻어나는 것도 불우했던 어린 시절이 남긴 흉터 같은 것이리라.

어린 시절, 그녀는 그리움이 사무칠 때마다 샛노란 꽃술을 찾아다니는 나비처럼 조그마한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노래를 불렀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맞춰 그녀의 입가에는 늘 노래가 머물렀다. 이 외로운 아이의 친구는 노래였으며, 이로부터 그녀는 삶을 배우고 꿈을 키웠다. 성인이 된 뒤에 도 그녀는 삶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거나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일을 겪을 때는 노래를 부르면서 맥 빠진 마음을 고쳐 먹고 희망을 이어갔다.

“어렸을 때 노래는 제 친구였습니다. 노래를 부르면 아주머니들이 또 불러달라고 채근하기도 했지요. 어린아이였지만, 바이브레이션을 구사할 정도로 노래 신동이었거든요. 또 전축이 있는 친구 집에 가면 친구와는 놀지 않고 전축하고 놀 정도였습니다. 노래가 너무 좋았고, 노래는 저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는 사랑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강달님은 눈물이 솟구쳐 오르는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집을 떠나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는 아버지,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가정을 지켜온 어머니, 그리고 이러한 생활에 적응해야 했던 그녀의 짐을 털어내는 길은 실컷 울어버리는 것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사춘기 시절 강달님은 말은 잘 못해도, 노래는 곧잘 부르는 소녀였다. 학창시절에도 음악시간만 되면 신이 났고, 수업이 끝날 때면 선생님은 강달님의 노래를 듣기 위해 독창을 시키곤 했다. 그녀의 노래를 직접 들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뻐근해진 몸마저도 나긋나긋하게 녹여버릴 정도다. 이후 그녀는 노래자랑에 나가 큼지막한 상을 타기 시작하면서 가수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노래 ‘태클을 걸지 마’로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가수 ‘진성’. 그는 어렸을 때 고아원을 그리워하는 소년이었다. 전쟁의 파도에 쓸린 고아처럼 3살 때부터 10년 동안 부모님과 헤어져 살았고, 친척 집을 전전하면서 주위 사람들이 주는 밥을 얻어먹으며 살았다. 밥을 얻어먹으면서 배고픔을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먹고 잠자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 무렵 그는 산등성이를 거닐면서 나훈아의 ‘기러기 아빠’를 불렀다. 부모님을 애타게 그리는 마음으로 목청껏 노래했다.

진성은 13살 때 부모님을 만나 서울에 왔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은 끊이질 않았다. 평온하다 싶다가도 느닷없이 전쟁은 시작됐고, 그 사이에서 그는 숨을 죽이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툼이 심해지자 외삼촌이 와서 어머니를 데리고 가버렸다. 그는 어머니를 따라 가려고 뒤를 밟았다. 정류장에 버스가 도착하자 그는 어머니를 따라 얼른 차에 올랐다. 그러나 외삼촌이 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는 버스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래도 그는 울면서 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나 외삼촌은 다시 그를 발로 찼고 어머니를 태운 버스는 그대로 떠나버렸다.

그는 진흙탕에 쓰러져 울면서 세상에 대한 분노를 키웠다. 그에게 있어 가족은 가장 험악하고 냉혹한 현실을 체험하게 만든 대상이었고, 세상마저도 뒤엉킨 그의 울분을 풀어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그는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거리를 전전하기 시작했다.

“가정적으로 가슴 아픈 시절을 살아왔습니다. 고아원을 그리워했던 소년이었지요. 그 시절의 기억을 떨쳐버리고 싶은데, 무척 힘들군요. 제가 살던 성산동에는 고아원이 있었습니다. 울타리 너머로 공을 차는 아이들이 보였지요. 문득 ‘부모가 없었다면 고아원에 갈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부모가 아니라 원수였지요.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 괴로운 마음에 술도 많이 먹고, 방황도 하고, 싸움질도 하고 그랬습니다.”

어린 시절 가수 ‘진성’은 유랑극단에서 노래를 불렀다. 흥행이 되면 자장면을 먹었고, 돈이 떨어지면 여관에 잡혀 살았다. 그것 말고는 밥벌이가 없는 줄 알았다. 그 이후 그는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자장면 배달, 손수레 도부치기(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장사치), 야간업소 일 등 해보지 않은 게 없다. 하루를 라면으로 시작해서 라면으로 끝내는 날도 부지기수였고, 반지하와 옥탑을 전전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는 “여름에는 옥탑, 겨울에는 반 지하를 열댓 번이나 옮겨 다니니 십여 년이 가버렸다.”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고생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슬퍼하지 않았다. 노래를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 홀로 그의 노래를 들었다. 노랫말 하나하나가 그의 인생사 같아 더욱 가슴속에 새록새록 스며온다.

노래 ‘꽃나비 사랑’으로 청아한 사랑의 감정을 심어주는 가수 ‘이상번’. 그는 말을 아꼈다. 무명가수 어느 누구 하나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는 반문이었으리라.

그는 오랫동안 들쑥날쑥한 수입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IMF가 터지고 나서는 운영하던 가게가 하루아침에 망해 빈털터리가 됐다. 녹화가 있던 날에도 보름 동안 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어 방송국에 가지 못했던 일도 있었다.

“가수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게 산 사람은 집사람입니다. 아내는 결혼해서 단 하루도 쉬고 않고 일했거든요. 돌아서서 눈물을 흘릴지언정 말없이 묵묵하게 따라와 준 집사람이 너무 고맙습니다. 먹고 싶은 것도 못 사주고, 공연 때문에 지방에 자주 내려가서 만나지도 못하고, 생일조차 챙겨주지 못해서. 동료 가수들도 많이 도와줬습니다. ‘형님 고생이 많습니다. 꼭 잘돼야 합니다.’라며 성원해 줬지요. 지금까지 음악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동료들의 힘도 컸습니다.”

▲ 진성. ⓒ이동권
이렇게 가수가 됐다

사람들이 알아봐주는 가수가 되기 위해 고드름처럼 얼어붙은 연예계에 나온 무명가수들의 삶은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마음의 울림을 좇아가는 것이 가수의 길이라지만 우울한 현실과 맞닥뜨릴 때에는 고개를 떨어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하게 살면서 제 힘으로 일하고 성장하기 위해 몸부림 친 사람들은 남들보다 조숙하고 깊이가 있는 법. 하지만 방송계의 가혹한 현실은 견디기 힘들었다. 때론 미래를 생각하기도 전에 의지부터 꺾이기도 하고, 때론 생각과 다르게 번번이 어긋나는 일과 마주치기도 하고, 때론 노래는 알아도 얼굴은 몰라봐 푸대접을 받기도 하고, 때론 진짜 가수가 맞느냐며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다. 이러한 고생을 하면서도 히트곡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무명가수들이 무수히 많다.

메들리 가수로 음반을 내면서 밤무대 명콤비로 활동했던 강달님. 메들리 음반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가수 인생을 시작한 그녀는 1992년 양병철 작곡의 ‘님 실은 페리호’를 발표했다. 그러나 1993년 부안 앞바다에서 페리호가 침몰해 297명이 사망하는 바람에 이 노래 제목을 ‘좋아했나 봐’로 바꿔야 했다. 참 별별 일이 다 생긴다. 그 이후 그녀는 방송활동을 접고 부곡하와이 전속가수로 활동했고 교도소나 군부대, 양로원 등을 돌아다니면서 노래 봉사 활동을 했다.

“서울에 올라왔는데, 막상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노래라면 누구에게도 지기 싫은 성격인데,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죠. 어렸을 때 저의 재능을 계발해주지 못한 가정환경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강달님은 음반을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방송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설 무대가 없었다. 트로트 프로그램에서도 유명한 가수들만 선호했기 때문이다.

“TV에는 만날 나오는 사람만 나옵니다. 노래 잘하는 가수들이 출연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너무 힘들어하니까, 노래를 그만두라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습니다. 제가 안 나오면 대한민국 가요계가 손해거든요.”

강달님의 노래 ‘사랑의 끈’을 사랑하는 팬들이 많다. 가슴에 와 닿는 진한 목소리 때문이다. 단전에서부터 끌어내는 풍부한 성량과 한이 맺혀 있는 듯 그윽하고 서글픈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인생길’이라는 노래는 그녀의 목소리와 감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곡이다. 특히 이 노래의 가사는 그녀의 인생철학을 빗대어 담고 있어 더욱 진한 감동을 준다. 요즘 가수 강달님이 밀고 있는 노래는 경쾌한 리듬의 ‘돌아올 수 없나요’다.

“밥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노래는 타고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회는 무명이라고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지방에 가서 다른 가수들과 함께 공연을 해도 노래가 끝나야만 악수를 청하고 사인을 해달라고 합니다. 노래는 알아도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실제 강달님은 방송계에서 노래실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무명이라는 이유로 설움이 많다. 그래도 그녀는 노래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세상을 살아보니까 사람은 변하는데 노래는 그대로였다.”는 그녀의 말처럼 이유를 내걸지 않고 진지하게 무대에 선다.

강달님은 4년 전부터 매니저 최종기 씨와 함께 일하고 있다. 처음 최 씨는 강달님이 건넨 CD를 우연히 받아 들었지만, 기대하지는 않았다. 한번 들어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노래를 듣는 순간 영혼의 울림을 경험했고, 그녀의 매니저가 되겠다고 자청했다.

최종기 씨는 “공연 소품만 해도 챙길 게 많은데, 혼자 일하다 보니 많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강달님은 소문난 연습벌레’라고 칭찬하면서 “이 노래 저 노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연습한 노래가 천 곡은 넘는다.”고 자랑했다. 갑자기 무대에 나가도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지만 생활 형편은 풀릴 기미가 없다. 월세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이들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잃을 것도, 숨길 것도 없다면서 진성은 뒷골목, 야간업소를 전전하며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밤무대는 아무나 나가는 게 아니라는 것. 겉모습이 듬직하고 호감이 갈 만큼 ‘뽀대’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아무리 토를 달아도 무명은 무명일 뿐이다. 손님들의 호응도 없고, 어떤 손님들은 욕을 하거나 먹던 땅콩을 던지기도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항의도 못한다. 또 무명가수는 반주를 해주는 사람들의 비위도 맞춰야 한다. 월급을 타면 고생했다고 족발이라도 사들고 가야지, 그러지 않으면 평상시와 다르게 연주해 낭패를 당한다.

그는 트로트 메들리 가수로 명성을 누린 뒤 1992년에 ‘임의 등불’이라는 타이틀곡으로 음반을 냈다.

“음반을 내면 방송국에도 다니고 가수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가수도 비즈니스였습니다. 돈 없고, 배경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듭니다. 노래 실력이 먼저가 아닙니다. 또 트로트 프로그램이 얼마 안 됩니다. 일 년에 한 번 나갈까 말까 하기 때문에 도리어 역효과가 나기도 합니다. 표정도 안 나오고 위축되는 경우가 많죠. 얼마 전에 TV에 나오는 제 모습을 보니 조선 팔도의 근심이 모두 제 얼굴에 있더라고요. 살아온 날이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2006년 진성은 신곡 ‘태클을 걸지 마’를 발표한다. 이 노래는 따라 부르기가 쉽고 빈틈이 없는 곡. 빙글빙글 손을 잡고 춤을 출 만큼 흥겹고 즐거워 대중성까지 갖췄다. 그럼에도 가사는 매우 진지하고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고향에 행사가 있어 2시간 먼저 내려갔습니다. 평소에 잘 들르지 못했던 아버지 산소에 가려고요. 막걸리와 1,500원짜리 오징어 하나 사들고 찾아가 인사를 올린 뒤 무덤에 기대어 하늘을 보고 있는데, 그때 환청이 들려왔습니다. ‘누가 태클을 걸기에 너는 아직까지도 그 모양으로 살고 있느냐?’는 음성이었죠. 갑자기 가사와 악상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전방에서 종이하고 볼펜을 빌려서 아버지 무덤 앞에 앉아 미친 듯이 노래 한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 노래가 바로 ‘태클을 걸지 마’입니다.”

가수 진성은 트로트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톱 가수가 되고 싶어 노래하지는 않는다. 애초부터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는 것. 그래서인지 그는 “‘이런 가수가 있었구나.’라고 보편적인 이미지만 남기면 된다.”고 말했다. 그에게 예를 들어 어떤 가수냐고 묻자 그는 ‘송대관이나 설운도 같은 가수’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추면서 살고 싶다’는 뜻을 실천하기 위해 봉사 활동에도 열심이다. 그는 또 홀로 사는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30만 원을 주고 임대한 주말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다. 도시보다는 야외로 나가는 것이 마음 편하다면서.

이상번은 음악 활동을 시작한 지 30여 년이 됐다. 중간 중간 영화, 연극, 뮤지컬, 연주 등 연예계에서 해보지 않은 일이 없는 팔방미인. 피아노 실력도 수준급이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도 주부 트로트 교실에서 굵직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노래 ‘꽃나비 사랑’을 가르치고 있었다.

주부들은 모두 진지하고 화기애애했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가수의 수업이라고 하지만 트로트 팬들에게 그는 그렇게 생소한 이름은 아닌 셈. 수업 도중 아주머니들은 “너무 멋있어요.”를 연발하면서 그의 노래 ‘인생은 새옹지마’를 불러 달라고 앙코르를 외칠 정도였다.

그는 1988년 ‘어머니’로 데뷔해 97년 ‘아버지’, 98년 ‘인생은 새옹지마’, 2003년 ‘꽃나비 사랑’을 냈다.

“가수는 노래로 승부하는 것입니다. 이름이 없다고 하지만 소리도 있고, 감정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 노래를 따라서 부르지 않을 때, 노래가 뜨는 건지 아닌지 헷갈리기도 하고 힘이 듭니다. 그래서 좋은 노래가 있어도 발표하기가 어렵죠. 느린 노래는 행사장에서 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선호하지도 않고요.”

이상번의 노래 중에 ‘이별 그리고 숙명’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소프트하지만 허스키하고 강한 음색이 특징이다. 또 빠른 노래는 그 나름대로 강렬한 느낌을 선사한다.

▲ 이상번. ⓒ이동권
노래로 감동을 주고 싶다

이름을 떨칠 날이 가깝지 않더라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가는 무명가수들. 아무리 무지몽매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갈구하는 것은 외면하지 못하기에, 현실을 초월하는 강인한 정신력은 탄생한다. 이들도 마찬가지다. 어떠한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고 최고의 가수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들은 또 노래만큼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는 자신감으로 당당하게 세상을 대한다.

강달님은 “아무리 힘들어도 신의를 지키며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악착같이 해서 끝장을 보고 싶습니다. 원로 선배님들이 저보고 정통으로 노래 부르는 친구라면서 끝까지 해보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저는 노래로 감동을 주고, 노래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고 싶습니다. 트로트계에 흔적을 남긴 가수, 하나의 획을 그을 수 있는 가수 말입니다.”

그녀는 실력 있는 가수들을 배려하지 않는 방송계에 대해서도 한마디 거들었다.

“스타만 선호할 것이 아니라 공평하게 밀어줘야 가요계가 발전합니다. 음악인도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노래, 좋은 노래를 들려줘야 할 의무가 있고요. 독자님들도 노래 잘하는 트로트 가수들을 열렬히 후원도 해주시고, 카페에도 들러 노래를 많이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http://cafe.daum.net/wsj8149)

진성은 “옛날 노래가 ‘시’와 같듯이 심금을 울리는 노래를 많이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노래 잘하는 가수를 살려야 합니다. 예술은 실력으로 판단해야죠. 방송계에서도 도덕성을 지켜야 하고요. 또 기성세대들이 우리 문화를 죽여서도 안 됩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가 나오면 레코드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투자도 안 하면서 문화를 즐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문화를 찾아서 즐겨주십시오. 우리 사회에도 노인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바로 미래의 자기 모습입니다. 문화를 즐기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풍부한 노후생활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진성 카페 -http://cafe.daum.net/trotJinSung)

이상번은 “트로트는 우리 삶이고, 생활의 노래니까 계속 사랑해주고, 많이 아껴주고, 많이 불러 달라.”고 말했다.

“트로트가 시대를 이끌어갑니다. 대중문화에서 트로트만 한 문화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부르는 이 노래가 영원한 애창곡으로 남을 것입니다. 또 노래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겠습니다.”

그는 ‘기대는 기대보다 실망이 크고, 실망은 실망보다 실망이 적다.’를 좌우명처럼 여기고 살고 있다. 가다 보면 길이 열리고 뜻밖의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노래 ‘인생은 새옹지마’처럼. (이상번 카페 - http://cafe.daum.net/leesangbeon)

오늘을 살아가는 힘

트로트 가수 강달님, 진성, 이상번을 만나면서 이들은 꼭 세찬 눈보라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야생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가수라는 직업을 운명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게 노래가 삶의 영원한 동반자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어떠한 역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이들을 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트로트의 탄생

트로트(Trot)는 일제 강점기에 탄생한 대중가요의 한 장르로, 구미 춤곡의 하나인 폭스트롯(foxtrot)에서 유래했어요. 하지만 일본의 엔카와 음계나 구성이 비슷해 엔카의 아류로 보는 의견도 많아요. 어떤 이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필연적인 대중 조작의 산물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초창기 대표곡으로는 1920년대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황성옛터’로 알려져 있음)>과 1930년대 고복수의 <타향(‘타향살이’로 알려져 있음)>이 있어요.

트로트와 뽕짝

꿍짝짝 궁짝(세 박자 또는 다섯 박자)을 트로트, 궁짝궁짝(두 박자)을 뽕짝으로 나눠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모두 같은 의미로 통용돼요. 보통은 트로트를 뽕짝이라고 하며 박자도 나누지 않고요. 단 뽕짝은 속어예요.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에요.

강달님

데뷔 | 1992년 ‘님 실은 페리호’
1994년 디스코 메들리, 트로트 메들리 1~10집 발표
1996년 ‘세월에 노래 싣고’ 발표
1997년 부곡하와이 전속가수로 활동
2002년 2집 ‘사랑의 끈’ 신곡 발표
2004년 삽입곡 ‘홈런’과 ‘사랑의 끈’ 시판
2006년 ‘돌아올 수 없나요’ 신곡 발표
2008년 ‘인생길’ 발표

진성

데뷔 | 1993년메들리 트로트로 데뷔 (이후 밀리언 셀러)
1997년 1집 ‘님의 등불’ 발표
2002년 2집 ‘내가 바보야’ 신곡 발표
2006년 3집 ‘태클을 걸지 마’ 신곡 발표
2008년 ‘내가 바보야’ 활동

이상번

데뷔 | 1975년 배우로 연예계 입문
창작극 ‘염꾼’, 번역극 ‘찰리 브라운’ 뮤지컬 참여
‘갈매기’, ‘무덤의 주검’ 등 20여 편의 작품에 출연
‘수렁에서 건진 내 딸’, ‘어제 내린 비’ 등 영화 출연
1990년 ‘어머니’ 옴니버스 음반으로 가수 데뷔
1999년 ‘인생은 새옹지마’ 신곡 발표
2004년 ‘꽃나비 사랑’, ‘이별 그리고 숙명’ 신곡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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