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희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이 있었다. 그 이듬해는 1896년 병신년, 아관파천. 온갖 제국 열강들에 의하여 나라가 들쑤셔지다 못해 일국의 왕과 왕세자는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전국에서 항일 의병항쟁이 일어나고 친일내각, 배후세력이라 불리는 자들, 친러파세력 등등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동안 불쌍한 왕은 몸을 은신한다.

1896의 병신년은 육십갑자가 두 번 돌아 다시, 2016년 병신년이 되었다. 오늘(19일) 광화문 촛불행진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한 나에게, 엄마는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셨다. 120년이 지났는데도 똑같다고 하셨다. 먼저 지치는 쪽은 이끌려가게 되어 있고, 그것은 일제강점기에도, 이승만 하야를 이끌어 냈던 4.19혁명 이후에도 그랬다고 하셨다.

마치 무당처럼 내게 “이렇게 세상이 뒤집어질 것 같은 기운은 사실 한 사람의 인생에 좋은 기운은 아니”라며, “나라가 뒤숭숭하니 돌아다니지 말고 몸을 잘 돌보라” 하셨다. 물론, 오늘 광장에 나가지 않은 이유가 ‘몸을 잘 돌보’기 위해서는 아니다.

엄마의 말씀처럼 늘 먼저 지치는 쪽은 국민이었다. 이 나라는 그럴 수밖에 없게끔 되어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늘 OECD 1위, 세계 1위, 전 세계에 유례없는 새 역사들을 양산해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니, 그렇게 했어도, 대한민국에서 안 될 것은 안 되었다.

조금 똑똑하다는 분들의 글을 읽어보면, 다들 박근혜가 하야하면 더 심각한 정국이 될 거라고 한다. 그럼에도 본인은 오늘도 '박근혜 하야'를 외치는 촛불집회 현장에 나갈 거라고 한다.

광장에 나가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 나갈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 청와대로 쳐들어가서 대통령을 끌어오자는 사람, 그래도 집회는 합법, 평화 집회여야 한다는 사람, 박근혜는 불쌍하다는 사람, 강제하야 반대운동을 벌이는 사람, 촛불은 어차피 꺼지게 되어 있다는 위정자들, 목소리를 내고 정의를 외치다 감옥에 간 사람, 외치다 북받쳐 생사를 달리한 사람,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상관없고 내 인생 사는 사람, 어쩔 수 없다고 생각 하는 사람, 알면서도 큰소리 내지 않는 사람, 몰라서 주저하는 사람, 하루아침에 내 부모와 자식을 잃은 사람, 여전히 TV 앞에 앉아 넋 놓고 있는 사람, 손가락으로 사람을 죽이는 키보드 워리어들, 무지와 무관심과 무모함이 길러낸 대한민국의 모든 피해자들.

삐뚤어진 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달려온 대한민국이라는 소설은 삼류 판타지만도 못한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조금이라도 송곳 같은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거나 감옥에 갔다. 그들을 감옥에 넣고 목숨을 잃게 한 사람들이, 이 ‘대한민국호’의 키를 붙잡고 있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이를 용인해 왔고, 모두들 무관심으로써, 또 내 삶의 버거움을 핑계 삼아 무응답의 허용을 해 왔다. 그 모든 무관심의 쓰레기들이 이제는 아무리 두들겨도 깨어지지 않는 무쇠 같은 산이 되어 저 궁궐 뒤에 숨어버렸다.

우리 모두는 아슬아슬한 물 위를 걷고 있는 것 같다. 또 누가, 언제 빠질지 아무도 모른다. 온 세상이 정신을 흩뜨린다.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은 이 판타지 소설을 자꾸만 들춰 누군가가 읽어주고 있다.

모두들 이러한 가운데 홀연히 새 삶을 살아내고 있겠지. 나를 잘 알고 또 잘 모르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다. 나도 생존을 위해 원하지 않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리고 싶은 세상을 위해 날밤을 새우며, 밀린 월세에 전전긍긍하고, 빚을 져서 공부를 하고 있는 일개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그리고 열심히 내 삶에만 집중한다고 해서 욕먹을 수도, 동시에 열심히 내 이야기와 세상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칭찬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모두가 그저 그런 인간들이 만들어 온 이날이다. 나 하나쯤 이렇게 산다고 세상이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다만, ‘더 나은 내’가 되려고 입을 여는 사람들은 세상을 바꾼다. 최근 내적, 외적으로, 또 내 주변의 일들과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며 더 더욱 확실해졌다. 나 혼자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 그리고 모두가 행복하다고 해서 내가 무조건 행복해지지 않는다. ‘행복’해져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지만, 요는 ‘세상에 나 혼자만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수많은 날들을 돌아, 다시 우리는 역사 앞에 서 있다. 내가 책에서 배운 역사가 나의 오늘이 되고 내 자식들의 역사가 되어 지금 내 발 아래에 있다. 정에 약하고, 혼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를 가르려 하며, 니 편 내 편을 나누려 하는 오늘의 대한민국이지만 ‘더 나아지고 싶은 나’들이 있다면, 그들 누구도 포기하지 말기를 바란다.

더 많은 ‘나’들이 모일 때까지는, 더 크게 외칠 수 있건 없건 마음을 지킨 채 그대로 남아주기를 부탁한다. 얼마나 더 흉흉히 흘러갈지 모를 이 싸움이지만, 오로지 나만의 것이 아닌, 나와 똑같이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을 어떤 누군가와, 또 미래의 나를 위해 견뎌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부쉈다고 생각한 벽이 늘 다시 우리를 덮쳐왔음이 역사를 통해 증명되지만, 우리 모두는 120년 전의 그 국민들과는 다르기에, 살아있을 수 있다. 내 양심을 지키고, 모두가 예상한 아픈 결말을 부수며 새 이야기를 쓸 수 있다. 지금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목소리를 감추는 사람들, 미적지근한 사람들. 모두 잘 살피며 ‘더 나은 나’와 ‘우리’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 써야 한다. 결말이 될 그날까지 우리, 무너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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