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아노동자 박덕제.
여름방학을 맞아 8월 중순 아들 영진이의 치아교정을 위해 병원에 갔었다. 치아에 보철을 장착하는 데 1시간 이상 소요되었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어떻게 지루함을 보낼까 대기실을 두리번거리는데 병원 벽 한 쪽에 마련한 책꽂이의 책들을 보게 되었다. ‘만화책을 읽을까? 아니면 잡지책을 읽을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김정현의 ‘아버지’라는 장편소설책이 눈에 들어왔다.

나에게 있어 아버지는 어색하지 않고 그리움이 묻어나는 단어이기에 머리보다 손이 먼저 가 있었다. 책을 손에 잡고 영진이의 담당의사 선생님이 호출할 때까지 정신없이 읽었다. 1시간 동안 책을 읽다가 아쉬움에 책장을 덮었다.

그리고 잠시 잊고 있다가, 며칠 전 갑자기 병원에서 읽었던 책이 생각났다. 도입 부분만 읽은 것이 못내 아쉽기도 하고 또 궁금하여 책을 인터넷으로 사서 오늘 다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책속의 주인공 정수는 지방의 대학교를 나오고 행정고시에 합격한 엘리트로, 유명해진 문화재청에 다니는 공무원이다. 그러나 중년이 되면서 진급의 한계, 그리고 가족들과 갈등이 심화되면서 췌장암 선고를 받는다.

이를 안 가족들은 마음은 괴롭지만 가족여행 등을 통해 죽음을 준비한다. 췌장암이 주는 고통은 가혹했고 친구인 남 박사에게 안락사를 요청한다. 결국 그의 뜻대로 안락사를 통해 죽음을 맞이하고 가족들은 슬퍼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내용들은 어느 한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이 사회의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더 눈물을 자아내게 하고 더 슬프게 하는지 모르겠다.

1997년 IMF(국제 통화기금) 이후 계속되는 경제위기 속에서 대한민국의 아버지는 직장과 가정에서 모두 위협받고 있다. 직장에서 존재적 가치와 권위를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투쟁하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퇴근 후 설 수 있는 힘조차 없는 녹초가 된 몸으로 또다시 아이들과 가정에서 일을 한다.

왜? 인터넷에서 읽었던 어느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쓴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시 속의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 주셔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도 쉬고 싶고 모든 것을 잊은 채 여행도 다니며 일과 가정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상시적 고용불안상태에서 단 며칠이라도 직장을 떠나 자유롭게 여행을 하며 즐긴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금 빈틈만 보이면 여지없이 후배사원에게 밀릴 수 있고 퇴출당할 수 있는 직장은 삶의 전쟁터이다.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몸뚱이가 아파도 아픈 몸을 이끌고 직장(전쟁터)으로 향하는 것이 아버지의 현실이다. 그래야만 가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일과 가정에서 당당한 아버지로 자리매김하려면 슈퍼맨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아버지가 슈퍼맨이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일과 가정에서 아버지의 존재적 입지가 좁아진 것은 사회 환경의 변화와 IMF 이후 경제적 위기 속에서 새롭게 형성된 비정규직 노동자 확대, 고용불안, 맞벌이, 청년실업 등일 게다. 경제성장의 둔화에도 불구하고 재벌들의 이익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더 많은 이익창출을 위해 노동자들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강요하고 위기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즉, 노동관계 조정법이 노동을 하는 노동자를 위한 법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악법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노동자들의 입맛에 맞게 노동법을 당장 개정할 수 없겠지만, 상시적 고용불안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는 신노동계급의 분화만큼은 반드시 개정해 막아야 한다. 앞서 어느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쓴 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에서 나오는 아버지로 살수는 없지 않은가?

책 속에서 주인공 정수는 직장과 가정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버림받았다. 그 버려짐의 끝은 죽음이다. 췌장암에 걸려 직장에서 가정에서 자신의 고단한 인생을 뒤돌아보며 아내 영신에게 욕설 아닌 진지함으로 퍼부었던 이야기는 현실을 살아가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였다.

아버지가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는 얼마만큼의 양인지 단위로 환산할 수 없지만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나누어야 할 무게이며 책임감이다. 그래야만 이 땅의 젊은 미래세대에게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기아노동자 박덕제

전 민주노동당 화성시위원회 위원장
전 금속노동조합 기아자동차지부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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