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뉴욕 양화점’ 한흥수 대표

 

▲ 한흥수 할아버지와 뉴욕 양화점 앞에서. ⓒ뉴스Q 장명구 기자

간판도 없었다. 단출하면서도 허름하기까지 한 상가 창문에 영어로 ‘New York’, 한글로 ‘양화점’, 그리고 바로 아래 전화번호가 쓰인 것이 전부였다. 그것도 눈에 띌까 말까하게. 안으로 들어서니 각양각색 수백 켤레의 구두가 즐비하게 전시돼 있었다. 좀 특별하다면, 기성화를 파는 구두 가게에서는 볼 수 없는 낯선 공간이 한쪽에 펼쳐져 있다. 구두를 직접 만드는 곳이다.

지난 7월 30일 오후 평택시 신장동 ‘New York(뉴욕) 양화점’ 한흥수(75) 대표를 ‘속닥속닥 우물가 기자단’이 찾았다.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돈이 없으면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없는 시절이었어.” 한 대표는 6·25전쟁으로 힘든 세월에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까지밖에 나올 수 없었다. 그렇게 구두를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됐다.

처음에는 ‘금강제화’라는 큰 구두공장에 취직했다. 그 시절 ‘금강제화’라는 기업은 직원이 3천명이 넘을 정도로 큰 기업이었다. 지금이야 몇 백명 수준으로 확 줄었지만 말이다.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송탄에 있는 오산미공군기지으로 옮겨 주한미군들의 구두를 만들어주는 일을 했다.

지금의 ‘뉴욕 양화점’은, 이 가게를 운영하던 분이 돌아가시면서, 3년 전 한 대표가 이어받게 된 것이다.

“구두가 발 사이즈에 딱 맞아 손님들이 마음에 들어할 때가 가장 보람차지.” 구두를 만들면서 한 대표가 느끼는 보람이다. 중학교를 갓 졸업하면서부터 지금까지, 60평생 구두 제작의 외길 인생을 걸어온 장인다운 말이었다.

오산시에 사는 한 단골손님은 한꺼번에 10켤레나 되는 구두를 주문했다고 한다. “그 손님은 한 번 우리 가게에 와서 신발을 맞춰 신고선, 우리 집 신발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해요.” 그때 만들었던 구두가 가장 인상에 남는 구두라고 했다.

한 대표는 “쓱싹쓱싹” 가죽을 자르고, “뚝딱뚝딱” 못질을 하는 등 구두 만드는 과정을 시범삼아 보여주기도 했다.

“가게 문을 열어도 공치는 일이 많아. 재밌는 일이 별로 생길 게 없지.” 요즘은 구두 만드는 일을 하며 별로 즐거운 일이 없다는 얘기다. 이미 구두시장을 기성화가 모두 잠식한 상황에서 수제화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다. 가겟세나 내고 용돈 벌이라도 하면서, 자식들에게 손을 안 벌리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래도 평생 해온 일이니 구두 만드는 일에 만족해. 후회는 없어.” 한 대표는 ‘속닥속닥 우물가 기자단’과 함께 ‘뉴욕 양화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사진을....

 

▲ 한흥수 대표가 구두를 만드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뉴스Q 장명구 기자

 

▲ 한흥수 할아버지와 속닥속닥 우물가 기자단. ⓒ뉴스Q 장명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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