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 성백원 시인

성백원 시인은, 아니 성백원 선생님은 저의 중학교 때 은사님입니다. 중3 때 담임선생님이셨는데 국사 과목을 가르치셨습니다. 제 기억으론 역사 수업도 수업이지만 선생님의 묵직한 저음이 중후하게 내리깔리는 노래 실력에 넋을 놓고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스승과 제자가 꼬박 28년만에 시인과 기자로 만났습니다. 선생님은 오산중학교에서 평생의 업으로 교편을 32년째 잡고 계셨습니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학교 다닐 때는 정말 상상도 못했던 ‘시인’이라는 직함도 함께 가지고 계셨다는 거죠. 무심하게도 세월의 무게는 선생님을 제2의 인생을 바라보는 60의 문턱에 들이밀어 놓았습니다.

뉴스Q ‘문학사랑방’도 선생님의 흔쾌한 제의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문학사랑방은 1주일에 한 편씩, 2~3번은 시나 수필을 실은 후 한 번은 작가 분을 인터뷰하는 식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여러 편의 시나 수필을 실었고 조석구 선생님 같은 훌륭한 분을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언젠가는 선생님도 인터뷰할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오산문인협회 5대, 10대에 걸쳐 회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솔직히, 제가 선생님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고나 할까요? 선생님을 만나 뵌 후, 언제부턴가 선생님은 저에게 카톡으로 선생님의 자작시를 이따금씩 보내주셨습니다. ‘어, 이 시가 선생님의 시였어?’ 기자라는 직업병을 떠나서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성백원 시인. ⓒ장명구 기자

7월 30일 갈곶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파나티카’라는 커피전문점에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선생님은 충청북도 영동군 어느 산골짜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5살 때 부모님의 손을 잡고 상경, 남대문초등학교, 한성중·고등학교, 건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습니다.

한국문인협회 오산지부(오산문인협회) 창립 멤버입니다. 21년 동안 오산문인협회와 함께했습니다. 국제펜클럽 회원, 한국경기시인협회와 오산문화재단 이사를 맡고 계시고, 장안대학교 강사를 역임한 바 있습니다.

지난 20여년 동안 선생님은 시집 ‘내일을 위한 변명’ ‘형님, 바람꽃 졌지요’ ‘아름다운 고집’을 발간하셨습니다.

상도 많이 받으셨는데요. 오산문학상, 경기문학상 작품상, 한국착각의시학 창작문학대상, 방촌 문학상을 수상하셨습니다.

- 선생님, 시를 언제부터 쓰기 시작하셨고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시는 그런 거 같아요.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 시가 많이 실리잖아요? 선생님이 그때는 무조건 (시를) 외우게 했어요. 못 외우면 혼나고 하니까 외우는데, 그때 박우극 선생님이 시를 잘 외운다고 교무실에 가서 외우기도 하고 했어.

생각나는 게 이육사 시인의 ‘광야’ ‘청포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윤동주 시인의 ‘별을 헤는 밤’... 그때 외운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별을 헤는 밤’ 같은 시는 무척 장시(長時)예요. 고등학교 때 기억력이 오래 간다는 게, 아직도 가끔씩 그것을 혼자 외우기도 해요. 그런 것들이 뭔가 인연이 됐어요.

중·고등학교 때 웅변을 했어요. 원고를 써야 되잖아? 잘 안 되더라고. 당시 원고라는 게 내가 쓰고 싶은 게 아니라 거의 (내용이) 반공이었으니까. 웅변이라는 틀에 맞추다보니 불만 같은 것이 있었어요. 뭔가 내 마음속에 있는 걸 표현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그때부터 하기 시작했지요. 그때는 주로 산문을 썼죠. 문학의 씨앗은 그때 떨어졌다고 봐요.

근데 결국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길로 가게 돼 있어. 그때 시를 외우고 그것이 나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씨앗이 떨어진 거지요. 군대 가서도 써 보고 하다가, 본격적으로 학교 근무하게 되면서 교지에도 발표하고, 그러다가 조석구 선생님을 만나게 돼 오산문인협회와 인연이 된 거지요.”

- 조석구 선생님은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오산에서 결혼을 하게 됐는데 처가의 제일 큰오빠인 최병달 선생이, 그 형님이 오산에서는 대단한 분이었어요. 서울대 졸업했고 친구도 많고 조 선생님과 절친이었지.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요. 조 선생님은 단체를 꾸리려다 보니 이런 저런 사람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나에게도 글을 한번 써 봐라 권유를 한 거죠. 그래서 오산문인협회 들어와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됐어요.”

- 선생님의 시 세계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시에는 쉬운 시가 있고 어려운 시가 있고, 또 자기도 모르는 시가 있어요. 남의 맘에 들려고 노력하는 시도 있고요.

난 그런 건 전혀 생각을 안 하고 써요. 내 시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삶과 닿아 있어요. 시에는 결국 그 사람의 성장과정이라는 게 표현이 되는 거니까. 성장과정에서 가난한 것을 많이 느꼈고 소외감도 많이 느꼈어요.

우리집이 시골에서 잘 살았다고. 영동에선 굉장히 아주 부자집이었지. 거기서 자란 형들이나 누나들은 귀한 대접 받고 살았는데 서울에 올라와 아버지가 장사를 하시면서 우리는 달동네에 살게 됐거든. 그러니까 말하자면, 형하고 누나하고 내 세계가 다른 거지. 이웃들도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경험세계가 달라요.

옛날에는 또 형제간에 층하가 있어요. 유교적인 장남선호사상, 남아선호사상이 있잖아요? 난 둘째아들이란 말이지. 거기서 소외감을 느꼈던 거지요.

그러다보니 가난하고 소외된 인자들이 나한테 많이 있는 거지. 시를 쓰거나 할 때도 그런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항의하거나 비판하거나 그런 작품들이 나와요. 사회적 구조나 모순에 대한, 내가 느끼는 분노 같은 게 있으니까.

결국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자유, 평등, 박애, 프랑스 정신이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 삶에 일반화될 때 우리 사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 우리가 바라는 사회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죠.

내가 쓰는 시들이 굉장히 외롭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위안이 되는 그런 시상을 보여주는 이유라고나 할까.

그래서 결국 시라는 것은 하나의 장식품이 아니라 튼튼한 집을 짓는 것처럼, 깊이 땅을 파고 기둥도 세우고 해서, 대충 머리에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떨어진 씨앗들이 오랫동안 숙성이 돼 가지고 씨앗을 묻고, 그렇게 하나의 튼튼한 시를 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오산문화재단에 내걸린 ‘봄’. ⓒ성백원

- 선생님의 시를 보면 ‘봄’이나 ‘꽃’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시에서 봄이나 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결국 인간은 내일이 있고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사는 거니까요. 봄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새로운 생명이 도래하는 그런 의미니까. 또 다른 출발이고 새로운 시작이고, 늘 새로운 것에 대한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이지요.

이런 것들이 늘 마음속에 불타고 있으니까. 봄에 대한 그런 것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게 있지요.

꽃은 인간의 삶에서 순수한 영혼의 흔적 같은, 자기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순수한 마음, 이것이 피어내는 흔적이 꽃이 아닌가.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서 피어 올린 영혼의 흔적같은 것이 꽃입니다.

얼마전 ‘고구마 꽃’이라는 시를 썼어요. 그것도 다문화 가족하고 닮아 있어. 고구마는 구황 식물인데 아열대 지방에서 자라요. 우리나라에선 기후가 안 맞아 꽃이 안 피는 게 원칙이지. 기후 이상이 오면 꽃이 핀데요. 꽃이 피면 열매가 실하지 못하데.

그런데 고구마 꽃을 봤단 말야. 그걸 보면서 이주여성들을 생각한 거야. 얼마나 힘들면 꽃을 피울까. ‘나 힘들어’ 하는 거 아냐? 그 표현 같아 그 시를 쓴 거야.”

- 많은 작품들 중에서 아끼시는 작품이나 기억에 남는 작품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자기 작품 귀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죠. 귀하지 않은 자식 하나도 없는 것처럼. 혹시 오산문화재단에 걸린 시 봤어요?”

- 네, 봤어요.

“그것을 제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더라고. ‘봄’이라는 시.

근데 그 시는 굉장히 우연한 기회에 금방 쓴 거예요. 어느날 친구를 만나고 늦게 전철을 타고 오는데, 봄이었어. 젊은 남녀 한 쌍이 너무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앉아 있는 거야. 그것을 보고 영감을 얻어 쓴 시지.

이 시는 짧은 데도 카이스트 학생들이 제일 좋아하는 시 중 하나라고 그러더라고. 삼단논법처럼 딱 떨어지니까 과학하는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거야.

한 회사에서 ‘봄’이라는 시로 카드를 만들어서 보내기도 하고, 내 허락도 없이.(웃음) 예전에 문화부장관하던 분이 연극인 손숙 씨가 출연하는 연극 초대장에 ‘봄’이라는 시를 인용을 했어. 국회의원이나 언론인들한테 연극 관람하라고 초정장 보내는데. 나중에 우연하게 보게 됐지.

그렇다고 그분들에 대한 감정은 없어. 사랑해 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거지. ‘봄’이라는 시가 많은 사람들한테 회자되는 거 같아요.

     기다림

매일 만나는 사이보다
가끔씩 만나는 사람이 좋다
기다린다는 것이
때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절망이지만
돌아올 사람이라면
잠깐씩 사라지는 일도 아름다우리라
너무 자주 만남으로
생겨난 상처들이
시간의 불 속에 사라질 때까지
헤어져 보는 것도
다시 탄생될 그리움을 위한 것
아직 채 벌어지지 않은
석류알처럼 풋풋한 사랑이
기다림 속에서 커 가고
보고 싶을 때 못 보는
슴벅 슴벅한 가슴일지라도
다시 돌아올 사랑이 있음으로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이리라

그리고 ‘기다림’이라는 시가 있어요.

사람이 서로 가까우면 상처를 입기가 쉽다 이거야. 오히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상처받는 경우는 없는데. 그런 걸 보면 서로 떨어져 보는 것도 좋겠다, 상처를 준다면 서로 떨어져 보는 것도 좋겠다.

그래서 거기서 그리움이 싹트고 다시 풋풋하게 서로에 대한 그리움으로 만났을 때 다시 돌아오는 사랑으로 서로 상처를 주던 세월을 이겨낼 수 있지 않냐. 그런 의미가 있는 게 ‘기다림’이란 시야.

이 시도 많이 읽히고 인터넷에 많이 떠돌아요.

내가 아이들하고 많이 생활하다보니 ‘청소’라는 시가 있어.

아무리 쓸고 줍고 해도 아이들이 지나간 자리는 꽃이다. 애들이 버리는 것을 야단만 치고 그러지. 그런데 애들은 버리는 거 의식을 하지 않는다 이거야. 애들은 당연하다고 보는 거야.

그것을 오히려 꽃으로 보면, 꽃이 지면 또 꽃이 피는 거니까. 결국 무언가를 없앨 수 없는 거라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아이들이니까 잘못을 할 수 있는 거지.

내가 먼저 청소를 하다보면 아이들도 느낄 때가 나중에는 오는 거지. 선행적인 것들이 후세에도 영향을 주는 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청소’라는 시,

또 하나는... 내가 너무 자랑이 많은 거 같은데...(웃음)”

- 선생님, 작품 자랑하시다보면 한도 끝도 없을 거 같아요.(웃음)

     아름다운 고집

시리게 흐르는
어둠을 뚫고
성마루에 우뚝
이제는 거치른 가슴
빈 들판을 적시자
적시기만 하자

눈 덮인 초가지붕
박꽃 같은 햇살로
세월의 더께를 녹여
우리 함께 노래를 하자
노래만 하자

절반의 생은
즐거운 착각으로
나머지 절반은
아름다운 고집으로
메마른 영혼에 별빛을 심으며
이제는 사랑을 하자
사랑만 하자

▲ 성백원 시인. ⓒ장명구 기자
“‘아름다운 고집’이라는 시가 있어요. 3번째 시집에 있는 건데 이 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

사람이 살면서 고집은 있어야 된다 이거지. 무조건 남에게 그냥 다 줄 수는 없잖아. 남의 입장에서 다 할 수도 없는 거고. 내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기준과 고집은 있어야 되는 거지. 내 삶의 어떤 가치 같은 건 있어야 된단 말예요.

그렇게 산 사람 이야기예요. 하나는 전태일 열사가 있어요. 남대문초 선배예요. 전태일 열사가 초등학교 졸업을 못했어요. 4학년까지 밖에 못 다녔지. 명예졸업식을 청계천 다리 전대일 열사 반신상 앞에서 했는데, 명예졸업장 수여할 때 내가 이 시를 읽어준 거지.

이 시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도 닿아 있어요. 노 전 대통령은 수많은 사람들의 질시와 공격, 무시를 당하고도 정말 고집스럽게, 끝끝내 당신이 품고 있던 국가, 사회, 삶의 어떤 가치,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그런 고집을 가지고 계셨어요. 이런 걸 아름답게 본 거지.

전태일 열사가 수많은 노동자들을 대변하면서 자기의 생을 바친 것이나 또는 노 전 대통령이 삶을 살면서 꿋꿋하게 자기가 추구하던 세계를 향해 가는 것이나, 이런 걸 아름다운 고집으로 본 거지.

그 중에 가장 핵심이, 절반의 생은 / 즐거운 착각으로 / 나머지 절반은 / 아름다운 고집으로, 삶에 있어 즐겁게 착각도 하고, 나머진 아름다운 고집으로, 2가지가 결국 삶이 아니냐. 그런 의미를 가진 게 ‘아름다운 고집’이란 시죠.

그리고 ‘그녀의 모자’라는 시가 있어요.

1997년도 박목월 선생님이 하시던 ‘해변시인학교’가 있어. 20회 때인데 안면도에서 했어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소재를 주면 밤새 시를 써요. 나는 3등 차하상을 받았지. 그 시가 ‘그녀의 모자’예요.

이 시는 우리 현실 상황하고도 인연이 있어. 같이 살던 부부인데 그 사람이 떠나갔어요. 그 빈방에 모자 하나만 있는 거야. 빈방을 모자 하나가 지키고 있는 거지. 방에는 그리움만 가득 고여 있고. 바람이 불어서 그 모든 그리움을 모두 데려가 버린 그런 내용이지.

현대인들이 굉장히 외롭고 쓸쓸하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 것을 얘기한 시예요.

     원평리에서

서산으로 가는 길을 따라
원평리
낯선 외로움 데불고
이 땅을 닮은 나도
저 하늘과 닮은 너도
서럽기는 매한가지
홀로 가는 노을빛에
눈물 흩뿌리고
감빛 등불 적막의 길을
서러움 함께 가네
그리운 것들일랑
그립게 걸어두고
너와 나
내일의 빛을 향해
그렁그렁 가야만 하네

마지막으로, ‘원평리에서’란 작품이야.

수원 칠보산에서 화성 쪽으로 넘어가면 원평리가 있다고. 설날이었을 거야.

이산가족이 옛날에만 있는 게 아니라, 전쟁으로만 생기는 게 아니야.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물질적으론 문명적 성장이 이뤄진 반면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정신적 측면에선 굉장히 잘못된 측면이 많단 말이지.

예를 들면, 이산가족이란 게 서로 재산 가지고 싸워서 형제간에 원수처럼 되는 경우가 많단 말야.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런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차라리 안 보는 게 낫다. 그래서 이산가족이 되는 거야.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고.

설날 갈 데가 없으니까 칠보산에 간 거지. 산을 타고 원평리 쪽으로 내려와서 버스를 탔어. 그 버스 안에 외로운 사람들이 많아. 외국인 근로자들이 설날이라고 노는데 갈 데가 없는 거야. 수원 시내로 나오는 거야. 그 사람들을 보면서 그 사람이나 나나 다를 게 뭐냐. 똑같은 외로움인데. 먼 곳의 등불을 보면서 가는 것이나 똑같은 거다, 이거지.

다문화사회로 가고 있고, 나누고 차별할 것이 아니라는 거지. 누구나 근본적으로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외로움, 그리움이라든가, 또 아주 약한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 다 있는 거 아냐. 인간적 심성 안에서 사회적 문제가 해결돼야 하고, 인정해야 되고. 그런 의미로 쓴 게 ‘원평리에서’란 시야.”

- 시를 한 편 탄생시킨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요. 선생님께선 시를 쓰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계신가요?

“시라는 것은 모든 게 소재예요. 사람, 자연, 물건,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게 소재야. 소재에 대해서 늘 써야 되겠다고 마음먹기 보다는 때에 따라서 ‘딱’ 걸리는 게 있어요. 시기적인 것도 있고, 내가 어떤 시안이 탁 트일 때가 있는 것처럼. 사람이 ‘아, 이거!’ 새로운 걸 발견한 것 같은 경우가 있죠. 그것에 관심을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이 찾고 빨리 찾게 되는 거지.

사람은 누구나 봐요. 시를 쓰는 사람만 보는 게 아니라. 가령 지렁이 한 마리가 있단 말야. 지렁이가 아스팔트 위를 지나가고 있는데 뜨거운 햇살아래 죽을 거라는 거 잘 알잖아. 얼마나 버티겠어? 다른 사람 의식해서 모른척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야. 저건 미물이니까. 그러나 시를 쓰려면 그걸 살려 줘야 돼. 오늘도 산에 가다 그걸 보고 나뭇가지로 숲으로 던져줬다고. 의도적인 것도 있지만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실천을 해야 돼.

어떤 사람은 시를 쓸 때 머리로 쓰는 사람, 가슴으로 쓰는 사람, 손발로 쓰는 사람이 있다고 그래. 난 삼위일체가 돼야 된다고 봐. 머리로는 맨 나중에 써야 되겠지. 먼저 가슴이 닿아야 돼. 내 마음속에 ‘울컥’하는 게 있어야 그걸 소재로 삼고, 그걸 실천으로 옮겨놓고. 그런 다음 시적으로 완성시키는 작업을 하는 거야.

어떤 시든지 간에 처음에 탁 나오는 시는 없어요. 아까 ‘봄’ 같은 시 외에는 별로 없어요. 암튼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키기 위해선 많은 사물들과 접하는 시간, 보고 느끼고 함께 호흡하는 시간이 있어야 돼.

등잔 박물관을 만든 사람은 등잔과 대화를 한다는 거야. 등잔을 바라보고 있으면 등잔이 다 얘기해 준대. 어느 시대, 어느 집, 어느 방에서 무엇을 하던 등잔이요, 얘기해 준다는 거지. 그 사람은 등잔을 하도 오랫동안 바라보고 등잔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등잔이 얘기를 한다는 거지. 시를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물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대화하려고 해야 해. 그런 관계 속에서 무엇인가 그가 못한 이야기를 대신해 줄 수 있는, 그게 시를 쓰는 과정이 아닌가.”

▲ 성백원 시인. ⓒ장명구 기자
- 앞으로 추구하실 작품의 세계는 어떤 것인가도 궁금합니다.

“좀더 할 게 있다면, 역사와 관련된 시를 좀 많이 쓰고 싶어요.

광해군이라든지, 흥선대원군, 강화도령(철종), 옛날 임진왜란 때 일본군으로 귀화해 외교적으로 활동하던 사람들, 더 올라가면 광개토대왕이라든가, 이런 시가 별로 없어. ‘역사시’라고 해야 되나? 역사와 관련된 소설이라든가 그런 건 있는데... 역사를 시로 풀어내는 것, 아이들한테 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역사와 관련된 시를 찾아내고 써보고 하는 것이 내가 앞으로 추가할 세계라고 할까.

역사라는 것은 결국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어떻게 서로 소통하면서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삶을 어떻게 해서든지 잘 살게 해주려고 하고, 피지배자 입장에선, 백성의 입장에선 훌륭한 왕이 되도록 견제도 해야 하고 자기 얘기도 전달을 해야 하는 거지.

그런 의미로 보면 역사와 시가 연관된 작품들이 앞으로 나오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좀더 나은 세상으로 가기 위한 계기가 되지 않을까.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야.”

- 선생님이 국사 선생님으로 교편을 잡으신 것이 시 세계에도 쭈욱 이어진 거네요?

“지금까지 써 놓은 것이 20여 편 있어요. 그런 방향으로 가려고 생각은 하고 있는데 그것을 좀더 구체화시키지 못한 거지.”

- 이야기의 방향을 좀 바꾸어서, 오산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과는 무엇이었나요? 오산문인협회에 바라는 바도 말씀해 주십시오.

“오산문인협회를 거쳐 간 분이 수백명이예요.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한국문인협회 오산지부’라는 하나의 공간이라는 거지. 이 공간이 사람에 의해 옮겨지거나 없어질 것은 아니잖아요. 이 공간은 영원히 존재하는 공간이고 사람이 들어왔다 나갈 뿐인 거지.

오산문인협회는 종가집입니다. 다 모여서 문학에 대한 앞으로의 정책, 전망까지 펼쳐나가야 하는 거죠. 안타깝게도 그게 잘 안 돼. 오산문인협회가 앞으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되겠고, 많은 분들이 오산문인협회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 줘야 돼요.

시비공원도 조성하고 오산시인학교도 개최하고, 문학적 역량을 가진 어린이들을 발굴해서 교육하는 활동도 해야 해요.

이제 겨우 밭을 만들어 놨다고 할까. 여태까지 잡초도 많고 돌도 많았는데 그런 걸 골라내고 제대로 밭 하나 만들어 놓은 거지. 여기에 뭘 심어서 무슨 열매를 맺느냐 하는 건 후임들이 할 역할이지요.

새로운 윤민희 회장이 굉장히 열심히 해서 위상도 높아지고 잘 돼 가고 있어요. 앞으로 오산문인협회가 자기 만족에 그치지 않고 오산 시민들에게 문학적인 힐링을 주고 희망을 주고, 그런 것들이 일상화되었으면 해요.”

- 문학을 하는, 특히 시를 쓰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 주신다면요?

“시를 쓰는 사람은 시를 쓰려고 하지 말라.

시를 쓰려고 하다 보니 완성도가 떨어진다니까. 단 한 줄이라도 그냥 내 마음을 쓰는 거지, 내 마음을 쓴 다음, 이것을 가지고 잘 다듬는 작업이지. 처음부터 뭐에 대해 시를 쓸 거야, 그렇게 하면 완성이 안 돼요.

그래서 시를 쓴다는 것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내 마음속의 감성을 드러내는 거예요. 내 안에서 나온 것을 잘 다듬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엑기스를 추려서 작품을 완성시켜나가는 거야.

아까 얘기한 것처럼, 집을 지을 때 기초가 튼튼해야 되고 기둥이 튼튼해야지 오래 가는 집이 되고 사랑스러운 집이 되는 거지. 기초는 대충해 놓고 인테리어만 잘하려고 하면 안 돼요.

그럴러면 삶에 대해 깊이 있게 들여다 봐야 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봐야 돼.

정말 시에는 힘이 있어야 돼요. 에너지가 있어야 되거든. 내 진짜 속으로부터 나와야 되거든. 정말 느껴야 되고. 그런 노력을 좀 해야 될 거예요.

인간적인 시를 쓴다고 해서 시만 잘 써선 안 돼. ‘시를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마음 씀씀이가 다르네. 배울 게 있네’ 그래야지. ‘저게 시인이야. 시를 쓴다는 사람이 저 따위로 해’ 그러면 안 돼요. 시는 나의 삶과 일치가 되도록 노력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인터뷰는 끝났습니다. 선생님은 언론으로서 뉴스Q가 오산 문학과 예술이 나아갈 정책적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나 역할도 많이 해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변덕스런 소나기가 한 차례 쏟아붓더니 어느새 물러갔습니다.

“영달이 하고 연락해서 언제 또 술 한잔 해야지. 선생님이 한잔 살게.”
“네, 알겠습니다. 다음 주에 한번 연락드리죠.”

선생님은 커피숍 문밖까지 나와 손을 흔드시며 제자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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