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5경기본부 노세극 홍보위원
광복-분단 70주년을 맞아 70년대 노동운동 선배들과 함께 지난 6월 12일부터 16일까지 4박5일 동안 백두산 역사평화기행을 다녀왔다. 소통과 혁신연구소(소장 정성희)에서 주관한 행사로서 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하에서 모진 탄압을 받아가며 청계피복, YH, 원풍, 반도상사, 삼원섬유 등에서 민주노조운동을 한 선배들과 우리 근 현대사의 피눈물이 서려있는 항일독립운동의 유적을 둘러보고 민족의 정기가 서려 있는 백두산의 장엄한 풍광을 마주하였으니 뜻 깊은 여정이 아닐 수 없었다.

첫날 길림성의 성도인 장춘 공항에 도착하여 미리 대기하고 있던 관광버스에 올라 길림을 거쳐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주도인 연길까지 고속도로를 질주하였는데 이 길이 다음 날 간 두만강변의 도시인 도문까지 이어져 중국 중앙 정부에서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창지투(장춘-길림-도문을 잇는 경제 개발 사업) 선도구 계획의 일환으로 건설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길 뿐만 아니라 여행 일정 동안 정말 많은 길이 새로 놓여져 있고 또 건설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였는데 산과 산을 잇고 강을 건너는 무수한 교각을 바라보며 변경지대에 쏟는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읽혀졌다.

다음날 우리는 연변조선족 박물관과 혁명기념관을 가 보았는데 민족 문화를 지켜온 동포들의 삶과 일제 침탈에 맞서거나 국공 내전에서 목숨바쳐 오늘의 신중국을 있게 한 수많은 동포 열사들과 투사들의 고귀한 얼을 알 수 있었다. 주은래가 연변에 와서 이야기하길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열사기념비’라고 경탄했을 정도로 조선족은 목숨을 바친 무수한 열사들을 배출하였다.

두만강에서 배를 타는 일정에선 망국의 설움을 안고 이 강을 건넌 선조들과 ‘눈물 젖은 두만강’의 노래 곡조가 절로 떠올랐다. 그러나 한편 강 건너편 북녘 조국의 산과 언덕을 보면서 고난의 행군 시절의 가시지 않은 흔적인지 아직도 나무가 제대로 자라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애잔하게 다가와 안타깝기만 하였다. 이어서 해란강이 흐르고 일송정이 있는 용정의 대성 중학교와 시인 윤동주의 고향인 명동촌을 방문하여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던 선각자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삶을 기렸다.

이도백하로 가서 둘쨋 날 밤을 잔 다음 날 일찍 일어나 백두산에 올랐다. 산으로 오르는 길에 차창 밖으로 빗살이 때려 천지를 볼 수 없을 거라는 불안한 마음이 있었으나 정상으로 가까이 가자 맑게 개었다. 마치 하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둔 것처럼 우리가 천문봉에 올랐을 때 맑게 개어 천지의 장엄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장백폭포를 다녀오고 나서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 다음으로 불과 한 두시간 뒤에 올라 간 팀들은 안개와 구름이 가려 천지를 볼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듣고 우리는 산전수전 다 겪은 선배님들의 기가 쎄서 나쁜 기를 다 몰아냈기 때문에 오롯이 천지를 감상할 수 있었다며 선배님들께 공을 돌렸다.

우리는 백두산을 등지고 백산을 거쳐 통화로 가서 3일째 여장을 풀었다. 통화는 압록강변에 있는 도시로 큰 도시였다. 고층 아파트와 빌딩이 들어섰으며 2006년에 왔을 때에 비해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일제에 나라가 망하자 독립운동가들이 압록강을 건너 이곳으로 왔다. 유명한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유화현 삼원보도 통화 시 관내에 있는 곳이다. 통화의 밤거리를 거닐며 상념에 젖다가 유동우 선배님과 만나 포장마차에서 맥주를 마시며 지나온 삶의 역정을 들었는데 예전 독립운동가들이 나라를 찾겠다고 가정을 돌보지않아 집안이 풍비박산된 것처럼 오늘의 노동운동가도 고문 후유증과 가정의 해체로 비슷한 과정을 겪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독립운동은 양상을 달리하여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4일 째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에 가서 광개토대왕비와 대왕릉, 그리고 장수왕릉을 보았다. 2006년도에 왔을 때는 공사를 한다고 하여 관람을 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매우 아쉬웠었는데 마침내 보게 되니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 갔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릉은 허물어지고 도굴된 채 방치된 모습이어서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상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한심한 후손들이라는 자책이 밀려왔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지척에 있건만 위대한 조상들의 도읍과 유적을 방치한 예전 왕들이나 정치하는 작자들이란 얼마나 한심한가 하는 비난과 원망의 마음도 밀려왔다.

집안을 뒤로 하고 단동으로 향했는데 시내로 들어가기 전에 압록강 유람선에 올라 위화도와 북녘 산천을 바라보았다. 위화도는 여의도의 7배나 되는 크기로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하러 군사를 끌고 왔다가 회군한 지역으로 우리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섬이다. 그런데 위화도는 강 가운데 있는 섬이 아니고 한 쪽으로 치우쳐 있는 섬이었다. 즉 조선 땅과는 큰 강물이 가로 놓여 있어 멀찍이 떨어져 있으나 중국 쪽으로는 바짝 붙어 있어 강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강폭이 도랑물처럼 좁았다. 그런데 그 좁은 도랑을 건너지 않고 밍기적 거리다 회군을 한 이성계를 생각하니 분노와 개탄과 푸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배반과 역적질의 역사는 현대사에서도 박정희 전두환 등 정치군인들에 의해 재현되었으니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단동에 가서는 북한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들어가 저녁 식사를 했는데 마침 그날이 6월 15일 즉 6.15선언 15주년이 되는 날이라 북녘 여성 봉사원들이 보고 있는 현장에서 조국 통일!의 건배를 외치며 6.15 선언 15주년의 의미를 되새겼다.

단동에서 4일째의 밤을 보내고 다음날 마지막 여정은 대련을 거쳐 여순으로 가서 여순 감옥을 참관하였다.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이회영 선생들이 순국한 장소에 가서 옷깃을 여미며 그들의 숭고한 생애를 살펴보았다. 그분들야말로 역사의 찬란한 별이며 그 분들이 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번 여행은 독립운동의 역사 유적지와 고구려 유적지를 돌아보며 민족이란 무엇인가? 우리 민족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여정이었다. 70년 분단 세월을 하루 빨리 마감하고 통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이 민족 지상과제인 통일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 여행이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이번 여행의 명칭이 백두산 역사 평화기행인데 이를 차량에 부착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쓰지 않는 백두산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또한 이튿날 두만강변까지 우리가 가는 곳마다 중국 공안이 따라 다녔다는 점이다. 뭔가 특출한 행동 예를 들면 민족적인 노래를 부르거나 만세나 구호를 외치거나 국기를 게시하는 등의 행태를 하는지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이후에 가이드가 처벌 받는다는 것이다. 공안을 의식해서 라기 보다도 안내해준 동포 청년에게 피해가 갈까봐 우리는 조심스럽게 행동했는데 어떻든 동북공정의 실체를 피부로 느낀 것이다.

메르스가 창궐하는 것을 보고 떠났는데 짧은 일정이었지만 돌아오니 메르스는 여전하였고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주변 상황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에도 국내 상황은 여전히 혼돈 그 자체였다. 분단 70년이 되었음에도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속절 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메르스 소동 속에서 묻혀 가고 있었다.

첨언 : 소통과 혁신연구소는 계속 백두산 역사평화기행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7월에도 8월에도 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이니 가족단위로 가도 좋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소통과 혁신연구소가 운영하는 다음 카페를 들어가 보시면 됩니다.

6.15경기본부 노세극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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