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안병주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 안병주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장명구 기자

‘수원촛불’은 2008년 5월 6일 수요일 수원역 앞에서 처음 타올랐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광우병 의심을 받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겠다고 해 전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서울에선 5월 2일부터 촛불이 타올랐다. 수원지역 시민사회단체들도 감시단을 꾸려 활동에 들어갔다.

서울에서 먼저 촛불이 타오르자 언제부터인가 수원역 앞에서도 아이를 들쳐업은 어머니 한 분이 또 다른 아이와 함께 촛불을 들고 서 있었다. 혼자였고 조용히 그냥 촛불을 들고 서 있었을 뿐이었다.

수도권에선 각 지역별로 촛불을 따로 들기보다는 서울로 집중하던 분위기였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시민사회단체들이, 시민들이 하나 둘 자연스럽게 어머니 곁에 서면서 ‘수원촛불’이 만들어졌다. 초창기엔 매일같이 2~300명의 시민들이 모여 촛불을 들었지만 8월 15일 서울에서 대규모 촛불이 타오른 후 하강국면에 접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수원촛불도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매일하기가 버거운 상황이 되자 매주 수요일마다 진행하는 것으로 수원촛불을 이어온 것이다.

수원촛불은 2008년 말 겨울이 찾아오면서 모이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자 고비를 맞았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나와서 촛불을 이어가야 한다는 의견으로 모아졌다. 용산참사, 쌍용차 대량해고, 4대강 사업 등 갖가지 현안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침묵시위로, 문화제로, 서명운동으로, 때론 추모제로 다양하게 형식을 바꾸어 가며 이어졌다.

수원촛불은 10일 수요일이면 꼬박 288차 촛불이 된다. 희미하게 이어지던 촛불이 박근혜 정부 들어서 다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때문이다.

9일 수원 팔달구 남창동 다산인권센터에서 수원촛불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안병주 상임활동가를 만났다.

- 수원촛불을 다시 들게 된 이유는?

다시 드는 건 아니다. 아시다시피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대 여론이 굉장히 높았고, 그 힘을 가지고 그동안 수원촛불이 유지돼 왔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 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거나 촛불을 그만둬야겠다고 했다. 촛불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였다. 시민사회단체 분들이야 크게 동요가 없었지만 촛불만 들었던 분들은 굉장히 실망이 컸다.

그런데 지난 대통령 선거 자체가 어떤 사람, 어떤 기관에 의해 조작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된 과정이 있었다. 그동안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에겐 자기가 믿었던 상식적 수준의 민주주의에 대해 심각한 회의, 우려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나 생각한다. 국가정보원이라는 상징적인 국가기관의 호도에 다시 분노가 끓고 있는 것이다.

대선이 끝나고 수원촛불에 안 나온 분들이 다시 나오는 이유다.

-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보나?

국정원이 이번에만 그랬을 리는 없겠지만 구체적으로 드러난 건은 처음이다.

부정선거다, 대선개입이다, 이런 게 최소한 국민들에게 합의된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전면 부정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3.15 부정선거는 경험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이긴 하지만 그때도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민주주의가 선거라는 한정된 공간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헌법에서 보장된 민주주의가 뿌리채 흔들린 사건이다. 보수언론들도 팩트(사실)를 왜곡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사적 기관이 저지른 일이다. 하지만 국정원이라는 국가기관이 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 지금 수원촛불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나?

단일한 슬로건을 걸지는 않고 있다. 그럼에도 촛불을 드는 분들이 주장하는 건 다 옳고 합리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국정원 개혁이나 해체 주장도 있다. 특정한 주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다양한 주장이 표출되는 것이 중요하다.

- 수원촛불을 밝히면서 감동적인 사례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다.

쌍용차 대량해고 사태로 공장 안에서 점거파업을 할 때다. 쌍용차 다니던 분이 수원촛불에 나온 분이 있다. 그 분은 지금도 나오고 있다.

점거파업에 들어가서 수원촛불에 못 나오게 됐다. 그래서 촛불에 참여한 분들이 의견을 모아 우리가 가자고 했다. 공장 안에서 문화제할 때 우리가 갔다. 쌍용차 공장 안에서 수원촛불이 무대에 올랐다.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그 분도 많이 기억에 남고 저희도 기억에 남아 있다.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촛불을 들 때는 장동빈(현 경기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사무처장이 이포보에 올라갔다. 장 사무처장도 수원촛불에 나오는 분이다. 매주 수원촛불이 이포보에 갔다. 멀리서나마 장 사무처장을 만나고 왔다.

용산참사 사태 때는 유족들이 수원촛불에도 참여한 적이 있다.

수원촛불을 하면서 가장 힘들고 안타까울 때는 분향소를 차릴 때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굉장히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다. 용산참사 때 그랬고 쌍용차 대량해고 사태 때 그랬다. 비정규직들이 자살하기도 했다. 그런 분들이 생길 때마다 촛불 분향소를 차리고 추모했다. 그게 마음이 아프다.

수원촛불은 문화제인 만큼 집회신고를 하지 않는다. 집회는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다. 그런 면에서 수원촛불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꼭 신고를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에게 피해나 물리적 충돌이 없을 경우에는 대법원도 시위를 보장해야 한다는 판결을 한 바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로 집회나 시위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집회나 시위는 자유롭게 말하라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촛불을 드는 게 중요하다.

좀 웃긴 얘기지만, 촛불집회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매번 뒤풀이를 한다. 항상 가던 술집에서 각출해 계산한다. 착실히 모았으면 건물 하나는 올리지 않았을까 농담을 하곤 한다. 뒤풀이 자리가 좋아서 나오는 분들도 많았다.

- 무엇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중요할 것 같다. 수원촛불에 참여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마도 시민사회단체들만 있었다면 수원촛불은 유지되지 않았을 거다. 수원진보연대 같은 큰 단체는 한번 집중하자고 할 수는 있지만 매번 지속하기는 힘들다.

촛불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되는 시민들이 나와서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전달하기도 하고 그냥 촛불만 들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한 명이 되더라도 편하게 하자고 결정한 것이다.

2008년 분위기는 안 나지만 뭔가 사건이 터질 때는 촛불이라도 들어야 되지 않나. 수원촛불이 없다면 시민들이 표현할 방법이 없다. 나오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촛불을 들자. 민주주의를 표현할 수 있는 일상적 공간을 수원촛불이 맡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수원촛불이라는 물리적 광장이 맡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는 힘드니까. 그런 의미가 있다.

수원촛불에 참여하려면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수원역 앞으로 나오면 된다. 다음카페에서 수원촛불을 검색해 봐도 된다.

-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은?

수원촛불이 지금까지 버틴 이유는 촛불집회 때마다 펼쳤던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민주주의’ 플랜카드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5년은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느낀 시기였다.

민주주의를 어떤 제도를 가지고 지키려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촛불이 중요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어떠해야 한다는 추상적인 상이 아니라 구호로 외치듯이 ‘촛불이 민주주의다’ ‘우리가 민주주의다’라는 구체적인 언어다.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자기 삶을 빼앗긴 사람들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것이 민주주의이고 촛불이다.

앞으로도 수원촛불이 아니더라도 그런 공간과 시간, 그런 관계들이 지역사회에서 꾸준히 더 많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수원촛불은 계속 되겠지만 나오는 분들이 촛불 하나 드는 것에 머물지 말고 관계로 묶였으면 한다.

현대차 비정규직 문제가 그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 목소리로 함께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수원촛불에서 만들어졌으면 한다. 굳이 계획적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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