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안마사-결리고 쑤시는 육체를 풀어주는 사람들

기나긴 노력에도 대답이 없어 낙심도 하고
험난한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고개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세상에 떠밀려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언제나 억울한 일이 되는구나.

기본에 충실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크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천한 일이라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현실 인식이 부족한 정책을 결정할 때다.
때론 뒤이어 발생하게 될 일들을 심각하게 따지지 않는 풍토도 그 이유 중 하나다.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우리이웃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넓은 혜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점점 회복하지 못할 병에 신음하다 질식해버리고 말 것이다.
 

▲ 시각장애인 안마사 - 왼쪽부터 장재호, 성주월, 김대한 씨. ⓒ이동권

새하얀 눈이 휘날린다. 바람에 날리는 하얀 벚꽃 같아 잠시 마음이 훈훈해진다. 꽃가게에는 계절을 잊은 장미들이 만발했다. 풍성한 꽃잎이 하나둘씩 벌어지면서 풍성한 향기를 늘어뜨린다. 어둠이 땅에 깔리자 거리를 뒤덮은 네온사인들이 형형색색의 빛을 쏟아낸다.

그것이 그렇게 멋지다고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이날은 묘하게 가슴을 울린다. 아니, 이날의 거리 풍경은 모든 것이 인상 깊고 뜨겁다.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운 축복인가. 수수께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는 없지만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거리의 경치를 맘껏 즐긴다.

특별할 것도 없는 안마시술소

긴 복도를 따라 양 옆으로 문이 여러 개 붙어 있었다. 출입구 옆 우묵하게 들어간 곳에는 푹 꺼진 소파와 단을 만들어 설치해 둔 카운터가 있었고 꽁초가 수북이 쌓인 커다란 항아리 재떨이와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스러운 음료수 자판기가 있었다. 복도 가운데에는 색 바랜 그림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오랫동안 닦지 않은 듯 먼지가 뽀얗게 쌓였다. 상상했던 것보다는 매우 단순한 인테리어였다. 청소 아줌마로 보이는 한 중년 여성이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오리처럼 뒤뚱뒤뚱 걸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일상에서 늘 보던 모습 같아 잠시 긴장감이 사라졌다.

심통 궂은 얼굴의 한 젊은 남자가 나타나 오른쪽 첫 번째 방으로 안내했다. 3평 남짓한 방바닥에는 푹신한 이불이 깔려 있고, 한켠에는 TV가 놓여 있었다. 방 안에 있는 작은 문을 열었다. 욕실이었다. 욕실 바닥에는 군데군데 물기가 앉아 있었는데 청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윤기가 흘렀다.

방에는 큰 창문을 가린 커튼이 걸려 있었다. 커튼은 소금에 절인 오이처럼 칙칙하고 푸르죽죽했으며 무겁게 축 늘어져 있어 세상과 단절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쌩하고 들어왔다. 좀 전에 내가 걸어온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날씨만큼이나 차가운 도시 풍경에 숨이 막혔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무겁다.

TV를 켜놓고 편안하게 누웠다. 몸에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안마를 받으러 왔는데도 이상하게 긴장감이 가시질 않았다. 이제 무던해질 나이가 됐는데도 들뜨고 초조한 기분은 숨길 수 없었다. 처음 경험하는 일은 무엇이든 마음이 편하지 않는 것일까.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떠들썩하게 떠들어대는 TV 오락 프로그램으로 눈을 돌렸다.

10여 분이 지나자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양손으로 벽을 더듬고 발로 방바닥을 조심스럽게 짚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서다.

“샤워하셨어요?”

안마사가 물었다.

“아니요.”
“피곤할 텐데 샤워라도 하지 그랬어요.”

처음부터 샤워를 하라고 알려줬으면……. 무표정한 얼굴로 카운터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갑자기 미워졌다.

머릿속에는 다음에 뭘 해야 할지 물음표가 그려진다. 상대방이 앞을 보지 못하니, 소리를 내는 것도 부담스러워 지나치게 신경이 쓰인다.

“손님, 편하게 누워 계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해드릴게요.”

40대 중반의 남자 안마사였다. 눈동자가 사라지고 눈꺼풀이 내려앉았지만 오뚝한 콧날과 미려한 입술,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귀티는 여느 탤런트 못지 않을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정말 이렇게 멋진 얼굴은 오랜만이었다. 젊었을 때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용모로 처녀들 가슴깨나 울렸을 듯싶다.

“어디가 제일 아프신가요?”
“어깨가 아파요.”
“책상에 많이 앉아 있나 봐요.”

어깨를 만져본 그는 먼저 윗옷을 벗으라고 말했다. 두꺼운 옷 때문에 손이 미끄러진다면서. 그는 오른쪽 손부터 시작해 팔을 거쳐 어깨를 주물렀다.

안마사밖에 할 게 없다

“요즘 일반 안마사들 많지요?”
“예. 많지요. 맹인들만 안마를 할 수 있는데, 그게 지켜지나요?”

그는 먼저 말을 거는 내가 별스러웠는지 눈썹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그의 이름은 오정국. 그는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아니었다. 등산을 갔다 사고로 눈을 잃었다. 앞에 걸어가던 사람이 나뭇가지를 잡고 있다가 놓았는데 그 나뭇가지가 오 씨의 눈을 찔렀다. 그의 나이 32살 때의 일이다. 처음에는 따끔거리고 시린 정도여서 시력을 잃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하지만 점점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망막이 떨어져 버렸다.

“참 운도 없지요. 그 작은 나뭇가지에 실명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세상 참 야속하네요.”

그는 결혼해 아이도 있지만 몸을 움직이기가 번거로워 안마시술소에서 생활한다고 했다.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아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이혼한 듯싶었다. 나는 궁금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요즘은 선천적인 시각장애인보다 어느 날 갑자기 실명해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이 많다. 건강했던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가 돌연 앞을 못 보게 된 경우도 있다. 아니면 아주 작은 실수로 시력을 잃거나 합병증으로 눈이 머는 사람도 있다.

“눈을 잃은 뒤 뭐가 제일 힘들었어요?”
“먹고 사는 게 힘들었지요. 배도 고프고, 먹고 싶은 것이 있는데도 찾을 수가 있어야죠. 처음에는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전혀 먹지 못했어요. 음식 냄새는 나는 데 미쳐버리죠. 그리고 실명한 뒤 돈벌이가 없어서 고생 좀 했어요. 지금은 많이 적응이 됐어요. 그래도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여전히 두려워요.”

가슴이 무너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초월한 사람처럼 웃어버린다. 나 같았으면 말소리조차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흘렸을 것이다.

2006년 5월 헌법재판소는 ‘안마사에 관한 규칙’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시각장애인에게 안마사 특혜를 주는 것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 이 일로 생존권의 위협을 느낀 시각장애인들은 집회를 열고 눈물로 호소했다. 심지어 투신자살하는 장애인도 있었다. 결국 이러한 호소가 국회의원들을 움직여 시각장애인들만이 계속 안마를 할 수 있게 됐다.

우리나라 60만 장애인 중 3분의 1이 시각장애인이다. 이 중에서 80%가 안마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때는 일도 안 하고 만날 집회에 나갔어요. 우리처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안마밖에 없거든요. 우리가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됐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복지 수준도 낙후돼 있는 상태에서 일반인들에게 안마사 자격증을 주는 것은 ‘시각장애인들은 굶어 죽어라’는 말과 같거든요.”

그는 속이 많이 상했는지 한숨부터 내쉰다. 그래도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하고 말투는 매우 담담하다. 이러한 내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픔을 딛고 일어선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힘 같은 것이 느껴진다.

“자기들도 눈이 멀면 알 거예요. 공부 많이 한 대학교수들도 저처럼 사고를 당해서 안마사가 됐어요. 시각장애인이 되면 안마사밖에 할 게 없거든요.”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근육이 늘어지는지 노곤하다. 피로를 푸는 방법은 안마가 최고인 듯싶다. 몇 분 지나지 않았지만 마음마저 편안해진다. 젊은 나이에 누군가에게 몸을 맡긴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이 손맛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몸 구석구석을 지압하고 안마했다. 손이 닿는 곳마다 우드득 뼈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통증과 함께 몸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위도 안 좋고, 신장도 안 좋고, 심장도 안 좋네요. 꼭 보약 한 첩 해드세요.”
“어떻게 아세요?”
“시각장애인은 손이 예민해요. 만져보고 눌러보면 다 알아요.”

안마를 마친 그는 나에게 슬쩍 손을 내밀었다. 돈을 달라는 줄 알고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자 그는 손사래를 친다.

“악수를 청하는 거예요. 당신이 손을 잡아줘야죠. 당신이 먼저 악수를 청하면 제가 잡을 수가 없어요.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누굴 만나더라도 항상 제가 먼저 손을 내밀어요. 시각장애인을 만나면 꼭 손을 잡아주세요.”

▲ 안마시술소가 밀집한 대도시 유흥가. ⓒ이동권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어둠

안마사 김대한 씨는 29살까지 멀쩡했다. 인상 좋고 마음씨도 따뜻해 일등 신랑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사고로 두 눈을 잃었다. 섬유회사에 근무했던 그는 방직회사에 납품을 갔다가 짐을 옮기는 도중에 눈을 찔려 실명했다. 그때 그는 숨이 멎을 정도로 아팠지만 시력을 잃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백내장이 찾아왔다.

“수술을 받으면서 의사 선생님이 무리하지 말라고 했어요. 근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요. 집에 가려면 밤길을 걸어야 했는데 눈이 너무 피곤하더라고요. 밤이 되면 동공이 커지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 길을 걸어 다녔으니……. 언제부턴가 눈이 뜨끔하고 사물이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러고 나서는 앞을 보지 못했지요. 그렇게 시력을 잃고 1년 정도 삶을 포기하고 살았어요. 죽음과 삶을 오가는 시간이었죠. 정신병원까지 갔었거든요. 그 당시 형님 집에서 살았는데 아버지는 제가 방에만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 가슴 아파 하시다가 비명에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힘들게 가셨지요. 정말 조금이라도 앞이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는 “눈을 뜨면 보이지 않고, 눈을 감으면 잘 보인다.”고 말했다. 현실에서는 지팡이를 짚고 다녀도 꿈속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 조금이라도 앞이 보였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이 얼마나 깊고 깊은 것인지 조금은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성주월 씨는 21살 때 녹내장에 걸려 시력을 잃었다.

“갑자기 앞을 보지 못하게 되자 세상이 나를 버리는 것 같았어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못하게 되니까 가슴이 시리도록 아팠지요. 무엇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잖아요.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자살하려고도 했어요. 저만 그런 게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이 사고로 시력을 잃고 고통 속에서 살아요.”

장재호 씨는 26살 무렵부터 전혀 앞을 보지 못했다. 경기를 앓았기 때문이다. 경기는 열병처럼 열을 심하게 앓다 까무러치며 정신을 놓아버리는 병이다.

심화섭 씨는 5살 때 홍역을 앓고 눈이 멀었다. 어렸을 때부터 장애를 겪은 그는 맹인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얘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장애인이 있는 집은 풍비박산이 나요. 부모님들도 화병으로 돌아가시기 쉽죠. 다들 그렇게 살아요. 앞 못 보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오죽하겠어요.”

안마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

하루를 버티기 힘든 고통을 이겨낸 이들도 일반인들이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로 가슴 깊은 곳에 상처를 받는다.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니 그런 소리를 하는 것 같아 이해가 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은 금할 길 없다.

“사람들은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눈이 먼 게 낫지.’라는 말을 자주 해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가슴이 너무 아파요. 적게 본 사람보다 많이 본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훨씬 나아요. 저도 어렸을 때 봤던 별, 그림자, 엄마를 따라다니던 길들이 생각이 나요. 그것뿐이에요. 조금 더 봤으면, 생각이 났으면 좋겠어요. 어떤 사람들은 ‘세상 꼴도 보기 싫은 데 안 보는 게 낫지.’라는 말도 해요. 위로하는 것처럼 얘기해주시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불쑥 그런 얘기를 들으면 마음이 좋지 않아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시각장애인들은 또 보이지 않는다고 함부로 말할 때 어깨에 힘이 쭉 빠진다. 안마하러 왔다가 “장님이네.” 하고 가버리는 손님도 있고 맹인들이 침을 놓는다고 믿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침은 눈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보고 놓는 것. 시각장애인들만큼 손 감각이 탁월한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시각장애인 안마 침술원은 단골들이 많고, 이용하는 사람만 이용한다.

시각장애인들은 안마사로 열심히 일하면 그럭저럭 생활은 유지할 수 있다. 장애인이라고 특별하게 세금 혜택을 주지도 않지만, 이들도 그런 혜택을 바라지 않는다. 이들의 요구는 오직 하나, 안마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밖에 없다.

“직업선택의 자유가 없어요. 출퇴근도 불가능하고요. 집에서는 된장도 담그고, 바느질도 하지만 밖에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안마밖에 할 게 없어요. 시각장애인에게 있어 안마는 직업 이전에 생존권이에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나를 심화섭 씨가 뒤에서 부른다.

“손을 잡아주세요. 시각장애인은 당신을 볼 수 없잖아요. 손을 잡아봐야 당신을 알 수 있어요.”

나는 냉큼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연방 나의 손을 만져보더니 “손이 참 곱고 여성스럽다.”면서 웃었다.

이제부터 시각장애인을 만나면 손부터 잡아야겠다. 아니 일반인들과 만날 때도 손부터 잡아야겠다. 그래야 내 마음을 온전하게 전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심화섭 씨는 배웅을 하면서 내 손을 두 손으로 잡고 계속해서 쓰다듬어 주었다. 백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자애로움이 가득했다.

약손안마봉사단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이 기름 유출로 생지옥이 연출된 태안에 다녀왔다. 자기 한 몸 운신하기도 쉽지 않은 이들이지만 우리이웃의 아픔을 앉아서 그냥 볼 수 없었다. 기름때는 닦지 못해도 주민들의 피로는 닦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들은 기름바다가 되고 진구렁이 된 해변을 상상하면서 이곳이 자신들처럼 세상에서 잊혀지고, 버려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날 현장으로 자원봉사를 떠난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은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주민들이 실의에 차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면서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일을 자주 하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몸이 좋지 않아서 차 타는 게 힘들었고 기름 냄새 때문에 속도 많이 울렁거렸지만 마음은 뿌듯하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오히려 자기들이 우리를 도와줘야 하는데 이렇게 와주었다면서 대대적으로 환영해주셨죠. 이장님도 전화로 고맙다고 인사해주셨고요. 몸이 좋지 않은 할아버지도, 주민들도 모두 시원하다고 너무 좋아하셨고요.”

이들은 계속해서 ‘약속안마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들을 찾아 나설 예정이다. 몸이 성한 젊은이들도 하지 못하는 일들을 꾸려가는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에게 깊은 존경심을 느낀다.

안마사가 되는 방법은

시각장애인은 맹인학교에서 일정한 교과과정을 수료하면 안마사 자격을 받을 수 있어요.

안마사가 침도 놔요?

안마사는 지압이나 안마, 마사지도 하지만 안마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침을 사용할 수 있어요. 침은 3호침 이하의 미세한 침만 사용해요. 한의사가 놓는 전문적인 침과는 성격이 다르죠. 안심하고 맞아도 돼요.

안마사는 음란하다

음성적으로 성을 거래하는 안마시술소나 스포츠마사지 업소 때문에 건전하게 시술을 하는 곳까지 욕을 먹고 있어요. 모든 곳이 다 그렇지는 않으니까 편견은 갖지 마세요.

장애인으로 불러주세요

장애인을 장애우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장애인을 배려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이 용어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만든 신조어예요. 장애인을 특정한 집단으로 대상화한 명칭이죠. 장애인이 비주체적이고 비사회적인 인간은 아니잖아요.

진학과 취업이 어렵다

시각장애인을 비롯해 장애인들은 진학과 취업의 차별에 어려움을 겪어요. 학교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없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하고, 기업들은 장애인의무고용법을 지키지 않고 벌금을 내는 것으로 고용을 기피하죠.

장애인차별금지법

2009년 4월 11일부터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됐다. 주요 내용은 국가, 지방자치단체, 상시고용 300인 이상의 사업장은 장애인을 위해 시설정비, 보조기구, 인트라넷 접근성 보장 등을 제공해야 한다.

국·공·사립 특수학교, 장애아전담보육시설은 시설정비, 교육보조인력 등의 편의를 제공해야 하고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이후 신·증·개축하는 모든 공공건물, 공중이용시설, 공동주택 등에 편의시설 설치가 의무화된다.

공공기관, 종합병원, 복지시설 등은 비전자 정보에 대한 장애인의 접근권을 보장해야 하며, 직장보육시설은 여성 장애인의 수유 및 자녀의 상태 확인을 위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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