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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구 시인, ‘시간의 그물’을 던지다[인터뷰] 조석구 시인
장명구 기자  |  news@newsq.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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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6.14  20: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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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석구 시인. ⓒ조석구

시인의 집은 역시 달랐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정원이 펼쳐졌다. 장승과 솟대, 5층석탑, 쌍사자석등, 문관석, 동자석, 연자방아 등의 조형물이 운치를 더했다. 적송, 백송, 반송, 남천, 주목 등의 갖가지 나무들과 진달래, 철쭉 등의 온갖 꽃나무들이 널려 있다. 집 주위의 땅을 6번에 걸쳐 조금씩 넓혀 정원을 정성스레 가꾸었다.

조석구(74) 시인은 자신의 집(석남제/石南齊)을 소개하며 “시인의 집이라고 자랑하려고 정원을 꾸며 놨다”고 말했다.

집 안 2층 서재에 들어서자 책장이 책으로 빼곡하다. 너무 많아 절반 정도는 도서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조 시인의 해박한 해설과 함께 천재화가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찍은 사진도 볼 수 있었다.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국시문학상 상패도 눈에 띄었다. 마치 큰 서점에 들어와 있는 듯, 박물관을 구경하러 온 듯 잠시나마 착각에 빠졌다.

조 시인은 올 가을 또 하나의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70 노구의 몸에도 시에 대한 열정만은 청춘 못지 않았다. 천년이 가도 썩지 않는 인간문화재가 만든 전통 한지에 활자로 시를 새긴 아주 특별한 시집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들을 선정해 1년에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시인들만 책을 출판한다고 한다. 시 100편을 엄선해 싣고 단 1,000권만 인쇄한다. 시집의 제목은 ‘시간의 그물’이다. 조 시인이 붓글씨로 직접 썼다.

조 시인을 5월의 마지막 날 석남제에서 만났다.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허리 부러진 흙의 이야기’ ‘닻을 올리는 그대여’ ‘우울한 상징’ ‘시여 마차를 타자’ ‘바이올린 마을’ ‘붉은 수레바퀴’ ‘오래된 뿔’ ‘내 마음의 지평선’ 외 다수가 있다.

경기도문화상, 시문학상, 한성기문학상 외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바이올린을 전공한 사랑하는 아내와 슬하에 아들 둘을 두고 있다.

   
▲ 석남제 안마당 시비 앞에 선 조석구 시인. ⓒ장명구 기자

-오산에서 나서 자랐고, 그래서 오산에 대한 애착이 선생님의 시 세계에도 많이 반영된 듯합니다.

임마뉴엘 칸트가 한번도 자기 고향을 안 떠났다고 한다. 나도 오산에서 태어나서 오산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 집사람도 바이올린을 전공하다보니 그렇게 서울에 가자고 했지만,  끝까지 서울이 싫어서 안 갔다. 방황하다 미쳐도 시를 쓰리라.

서울서 중학교 다니다 워낙 가난해서 돈이 없잖아. 1학기만 겨우 마치고 오산중학교로 내려 왔다. 2학년 때 서정주 선생이 강연하러 왔다. 검정 고무신에 검정 두루마기를 걸치고 여자 제자를 데리고 왔는데, 그 모습에 반했다. 나도 이다음에 시인이 돼야 겠다는 생각이 나오더라.

전희련 선생님이 나를 전격적으로 키워 주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김윤식 평론가가 가르쳤다. 나에게 “당신 성공할 수 있다. 글을 써 보라”고 하더라. 그는 나하고 몇 살 차이 안 난다.

대학교는 문학을 좋아 하니까, 집에서 끝까지 반대했지만, 국문과를 갔다. 우리 아버지가 “시인은 가난하게 산다는 데 왜 시인을 하려고 하냐”고 하시더라.

아버지에 대한 시가 바로 ‘아득한 지평선’이다. 이 시를 참 좋아 한다.

‘오산시가’도 내가 짓고 ‘오산시민헌장’, 오산시충혼탑의 ‘헌시’도 지었다. 시민들의 성금으로 오산역 앞에 ‘오산역에서’ 시비도 세웠다. 성호초 100주년을 기념 헌시도 써 줬다.

-시 중에서 ‘오산역에서’를 특별히 추천을 해주셨는데요.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역’이라는 곳은 향수를 불러오는 곳이다. 서울로 강의를 다닐 때도 기차를 타고 다녔다. 기차역에 대한 향수가 있다. 시민들이 성금을 걷어서 세워 준 시비라서 고마워서 시를 냈다. 오산역을 사랑하고 아낀다.

   
▲ 조석구 시인. ⓒ조석구
-유년시절, 청년시절, 장년시절, 그리고 지금까지 선생님의 시 세계에도 변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선생님의 시 세계를 정리하신다면?

젊은 날에는 저항시를 많이 썼다.

‘허리 부러진 흙의 이야기’라는 시가 있는데 제목 자체도 그렇지만 농촌의 비참함을 나타낸 시다. 오산만 해도 6~70년대 고향을 버리고 다 서울로 떠나갔다. 그 당시 농사꾼들은 농촌에서 살 수가 없어 고향을 버리고 떠나갔다.

‘오산역에서’도 고향을 버리고 떠나가지만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올 것이다. 그런 내용을 쓴 것이다.

‘사랑과 자유 그리고 날지 못하는 새를 위하여’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KBS TV에도 소개된 바 있다. 이걸 보고 중앙정보부에서 온 거다.

“너를 잡아 가겠다. 날지 못하는 새가 뭐냐? 사랑과 자유? 우리나라에 자유가 없냐?”

유신시대였다.

아산만에 가면 긴 뚝을 따라 클로버가 있었다. 근데 클로버 꽃들이 전부 ‘자유를 달라’고 데모를 하는 것 같았다. 젊을 때였다.

‘아산만에 남긴 질문’이라는 시도 있었는데 ‘나에게 자유를 달라’고 직접적으로 쓸 수 없으니까 비유를 해서 표현을 했다.

기자인 친구가 “너 끌려가서 죽으려고 환장했어!” 그러더라. 당시 김국태라는 선배가 소설을 쓴 것을 가지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발가벗긴 채로 죽도록 맞은 적이 있었다. 고 김근태 민주당 고문의 형이었다.

그런데 시를 쓰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써지는 거다. 경향신문이나 동아일보에 칼럼을 써서 시끄러웠던 적도 있었다.

나이 먹어가면서 휴머니즘으로 바뀌었다. 인간이 왜 사느냐 하는 문제 같은 거다.

오산고 다닐 때 공동묘지 한 가운데를 지나다니곤 했다. 인생의 허무, 죽음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작품을 쓰고 싶다.

인간은 이승에 내던져진 존재이고 인생을 불공평한 것이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면 고생과 역경 속에 살아가야 한다. 태어난 순간에 운명은 이미 정해진 거다. 그러나 운명이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극복해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평생 시를 써 오셨는데 선생님에게 있어서 시란 무엇입니까?

시는 뭐냐? 시는 아름답다. 시는 따뜻하다. 시는 거룩하다.

아름답다는 것은 시를 통해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다는 거다.

시를 통해 그리운 것에 대한 마음이 생기고 그리워지면 슬퍼지고 슬픔 속에 절망을 가지게 된다. 절망에서 절망을 극복할 용기가 생기고 극복하면 환희가 오는 거야.

토지를 쓴 박경리 작가도 젊은 날에 과부가 안 됐으면 토지를 못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혼을 바라보며 인생에 대한 비애감,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문학은 아름다운 것이다.

한 불란서 시인이 뉴욕에 갔는데 뉴욕 광장에 깡통을 놓고 구걸하는 장님 거지가 있더래. 앞에도 ‘저는 장님입니다’ 이렇게 써 놓고서. 그런데 아무도 동전을 안 던지는 거다. 불란서 시인이 그 문구를 고쳐 써 놨다. ‘봄이 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 봄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써 놓고 나니 동전이 깡통에 넘쳐났다는 거야. 시는 따뜻한 것이다. 인간의 정을 불러내는 것이다.

시는 거룩하다. 이육사의 저항시, 윤동주의 저항시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든다. 한 편의 시가 한 편의 장편소설보다 낫고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 시는 그래서 위대한 거다.

   
▲ 한국시문학상 옆에서. ⓒ장명구 기자

-많은 시집을 내셨는데요. 선생님께서 꼽으시는 대표적인 시집은 무엇입니까? 아울러 애착을 가지시는 이유가 있다면?

대표적인 시집은 없다. 열 손가락을 깨물면 다 아픈 것이다. 좋은 시집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 멀었다. 좋은 시도 못 썼다. 한 1,000편은 되지만 아직 못 썼다는 거죠.

-많은 수상 경력 또한 가지고 계십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상은 무엇인가요?

한국시문학상을 받을 때 경쟁이 치열했다. 심사가 치열하다보니 유명해졌다. 모든 신문에 도배가 됐으니까. 조석구가 위대해지는 거야. 연락이 없던 제자에게도 연락이 오고 사방에서 연락이 왔다. 그 바람에 유명해졌다.

상을 받을 능력이 안 되는데 받게 됐다, 선배들이 받아야 되는데 죄스럽다는 식으로 수상 소감을 밝혔다. 원로들이 “조석구의 수상 소감은 고등학교 과과서에 실려야 돼” 그러더라.

-선생님의 강의는 꽤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정평이 나 있던데요?

수원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강의가 대단했다. 그만두고 나서 어느 해 가을에 수원여고에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머리를 길게 하고 하이얀 바바리를 걸치고 낙엽이 떨어져 흩날리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갔다. 1층에서부터 3층까지 학생들이 책상을 치고 난리가 났다. 사람들이 ‘아, 조석구가 오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단다. 나로선 참 감동적이더라.

조석구가 강의를 하면 시에 대한 얘기는 물론이고 로맨스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니까 꼭 들어야 된다는 분위기였다.

-깡마른 체구에 대쪽 같은 성품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평소 삶에 대한 소신이나 가치관이 있으시다면? 그리고 이러한 가치관이 선생님의 작품에도 많이 반영됐을 거라 보여지는데요?

나는 가치관은 진인사대천명이다. 그래서 나는 운명론자다.

운명은 정해져 있다.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운명론자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경향이 염세적이고 슬픈 게 많다. 내 시는 결론적으로 절망을 극복하고 환희와 용기를 갖자는 것이다.

올 가을에 낼 시집의 색깔도 빨강이다. 초록색을 좋아하지만 가을에 맞는 색깔을 택했다. 도전과 용기, 또 하나는 아픔과 환희 같은 빨강이다.

내가 가난한 시인으로 살지만 선비정신으로 살려고 한다.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을 마지못해 해야 하는 것처럼 더러운 인생은 없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식들을 위해서, 마누라를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얼마나 아니꼽고 더러운 일들을 참고 있나. 가급적 선비정신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 유명 시인의 시집을 펼쳐 보이며. ⓒ장명구 기자

-시인하면 일단 배고픈 직업으로 통합니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문학을 홀대하고 있기도 하지요. 어려운 환경에서도 문학에 정진하고 있는 젊은 후학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예전에는 거지로 살아도 시인이라고 하면 존경도 받았다. 하지만 황금만능주의 시대다 보니, 대학에서 국문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사회에 나가면 실업자 신세가 될 텐데 하고 안타까웠다.

시대는 변했다. 한 우물 파는 사람은 빠져 죽는다. 여러 개 우물을 파야 한다. 문학만 해선 지금은 먹고 살기 어렵다. 나는 문학만 하라고 권장을 안 한다. 시를 잘 쓰면 뭐해! 문학도 먹고 살아야 문학이고 뭐고 있는 거지.

후배들에겐 “좋은 작품 쓰라”고 얘기한다. 예술이란 게 다 그렇지만 어떤 게 좋다, 나쁘다 평가는 못 한다. 당대에는 못 알아 보지만 몇 백년 후에 유명해질 수도 있는 거다.

작품도 못 쓰고 알아 주는 사람도 없다고 하는데, “네 작품은 훌륭하다. 세상이 못 알아줄 뿐이다”라고 얘기해 준다.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고맙다. 장 기자님 인상도 좋다. 어려운 직업인데 이런 일을 같이 하니까 좋다. 열심히 해서 꼭 성공하길 바란다.

   
▲ 석남제 안마당에서. ⓒ장명구 기자

   
▲ 석남제 뒤뜰에서. ⓒ장명구 기자

   
▲ 천재화가 박수근 화백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조석구 시인. ⓒ장명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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