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산 스님. ⓒ6.15경기본부
무엇인가를 옳다고 믿는 마음을 ‘신심(信心)’이라 한다. 특히나 종교에 있어서는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물론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지만-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조차 불편함 없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반면에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믿는 것을 ‘맹신’이라고 한다. 그런 맹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기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종교의 가장 기본적인 과제가 교세확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전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나를 존경한다는 이유로 무작정 내 말을 따르지 말고 비판적으로 시험해 본 뒤에 받아들여라.” “스승을 따르지 말고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라. 스승의 말을 따르지 말고 그 말의 참 뜻을 따르라.” “직접 경험해 보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두루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믿지 마라.”라고 강조하셨다. 기본적으로 부처님은 당신이 길이요 생명이며 진리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포교나 선교에 있어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다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불편함이나 아픔이 아니라 편안함과 도움을 주는 가르침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적어도 오늘날 종교로 일컬어지는 가르침은 몰라도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희망을 주어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고 존경해 줄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 이웃 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존경할 때 다툼이나 혼란 그리고 전쟁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수 백만 건 이상의 조회수로 관심을 주었던 민족문제연구소의 다큐 ‘백년전쟁’에 대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족들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니 다큐에서 주장했던 부분에 대한 반론이라는 것들이 사실에 입각한 사료를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의도가 아니고 이런 의도였다.’라는 식의 자기주장에 그치고 있기에 안타까움이나 실소를 넘어 불쾌한 느낌이 든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긴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의 자손들이 그 잘난 선조들의 재산을 찾겠다고 소송하는 웃기지도 않는 시대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럼에도 이건 도저히 아니지 싶다. 예를 들어 끔찍한 살인사건을 저지른 오원춘이 불우이웃 돕기에 성금을 보냈다고 그 죄를 묻고 선행을 기리자고 한다면 피해자 가족이나 그 뉴스로 충격을 받았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군사독재 시절 빨갱이로 몰아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더니 이제는 ‘종북좌파’라는 희한한 용어를 들이대고 있다. 국회의원의 20%가 종북세력으로 그들을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는 좋은 세상이다.

세계 뉴스의 중심이 되어 비웃음으로 대한민국의 이름을 더럽힌 대통령의 얼굴이었던 윤모씨 사건도 친노종북세력 때문이기에 의병장으로 새 출발하라고 두둔하는 정신없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도대체 언제까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사건마다 이데올로기의 낙인을 찍어 비난하고 매도할 것인지 궁금하다. 그런 맹신도들이 참 안쓰럽다.

불교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바른 일(행동)’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항상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른 일(正業)을 하기 위해서는 ‘바른 시야(正見)’가 전제되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내 안경의 빨간색 렌즈를 통해 바라 본 세상은 본래의 색이 아니라 빨간색이 덧붙인 모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불교에서는 바른 결정을 내리는 사람을 진정한 리더로 본다. 그런데 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바른 시야를 갖고 있어야 함이 당연하다. 그러나 왜곡된 시야로 사람을 잘못 선택하여 벌어진 상황임에도 정작 본인의 잘못은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얼마나 더 지켜보게 될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사람은 자신의 욕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만 행복해 질 수 있다. 도덕적으로 바른 결정을 내릴 때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않는 것 자체가 나쁜 행동일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모든 사람들이 맹신에서 벗어나 바른 신심을 갖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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