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 수행비서·운전기사-VIP 모시는 사람들

생활에서 기분을 전환하고
일상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 아니라 소박한 기쁨이다.
그것이 타인을 위한 것이라 해도 무엇이 문제이랴.

현대인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값진 것에 머물러 있어야 존재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보잘것 없어 보이는 일도 누군가에는 밥이 되고, 힘이 되며, 값진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 하루,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자. 욕망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쫓으면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 VIP 수행비서·운전기사들이 이용하는 차량. ⓒ이동권

두 시간이 지났다. 승용차 안에서 음악을 듣고, 신문을 보고, 잠을 자는 것도 지겨운 일. 박기범 씨는 날이 어두워지자 담배를 꺼내 물고 밖으로 나와 가슴을 펴고 심호흡했다. 그리고 주차장 한편에 있는 팔걸이의자에 앉아 담배 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 박 씨는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두 다리를 가지런히 쭉 뻗어 위아래로 엇갈아 흔들었다. 하지만 VIP 운전기사 경력 10년에 생활교양은 기본. ‘누구 집 운전기사가 이상하더라’는 소리가 나올까 봐 몸단속을 했다. 박 씨는 한때 이런 환경이 적응이 안 돼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처자식 걱정에, 가족처럼 믿어주는 VIP 때문에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박 씨가 수행하는 VIP가 고풍스러운 문을 열고 술집에서 나오는 시간. 그는 승용차 조수석에 앉아 백미러에 얼굴을 슬쩍 한 번 비췄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한 뒤 마지막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잠시 후 우윳빛 같은 전등이 환하게 켜지고 여러 사람들이 웃으면서 우르르 몰려나왔다. VIP와 그의 친구들이다. 박 씨는 자동차 뒷좌석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연 뒤 허리를 약간 굽혀 인사했고, 고운 정장을 입은 VIP는 친구들과 인사를 마치고 차에 탔다. 박 씨는 뒷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성큼성큼 걸어 운전석에 앉았다. 그는 매월 둘째 주 수요일 저녁마다 이와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VIP가 모임에 빠지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번 똑같다. 그 대신 이날은 VIP를 집에 데려다주면 업무 끝. 비교적 빨리 퇴근하는 날이어서 기쁘기도 하다.

“일은 어렵지 않아요. 일주일만 따라다니다 보면 어떤 일을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어요. 가는 곳도 거의 정해져 있고요. 집과 회사를 왔다 갔다 하고, 자주 가는 식당이나 골프장, 갤러리, 술집, 대부분 갔던 곳에만 갑니다. 근데 가끔 운전기사가 하인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깍듯하게 모셔야하고, 무슨 얘기를 들어도 못 들은 척하고, 어디를 가든 다 따라다니면서 수발들어야 하고.”

박 씨를 개인적으로 알게 된 지 10여 년이 넘었다.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긴 뒤 그의 이름을 잊고 지냈지만 얼마 전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안부를 전하게 됐다. 이런 우연이 이 책의 주인공 중 하나로 VIP 운전기사와 수행비서를 선택하게 된 이유다. 그러나 몇 차례의 요청에도 박 씨는 사진 촬영을 끝내 거절했다. 친분이 없었다면 인터뷰조차 불가능했을지 모르겠다.

택시, 트럭 운전보다 좋고도 나쁜 점

박 씨는 VIP 운전기사를 하기 전 영업용 택시를 잠시 몰았다. 이때는 까다로운 손님에게 질리기도 하고, 번잡한 교통사정으로 신경 쓸 일이 많아 피로를 항상 달고 살았다. 또 불규칙한 생활로 생체리듬이 깨져 시시때때로 위궤양과 요통이 도졌다. 하지만 VIP 운전기사를 하면서 몸이 굉장히 좋아졌다.

“규칙적으로 일어나서 움직이니까 몸이 좋아지더라고요. 택시를 운전할 때는 장거리, 심야운전으로 몸이 몹시 무거웠거든요. 사납금 벌려고 무리하게 운전하다 보면 자세도 삐뚤어지고, 제때 피로를 풀지 못해 디스크도 생기고요. VIP 운전기사는 대기하는 게 지겨워서 그렇지 몸은 별로 피곤하지 않아요. 도로가 막히면 시간을 맞추지 못할까 봐 짜증도 나고, 술도 마음껏 마시지 못해 답답하지만요.”

편안한 와중에도 그 나름의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특히 운전은 교통사고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박 씨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사고 때문에 긴장을 놓지 않는다. 물질적인 손실도 막대하지만, 직장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고에 신경을 많이 써요. VIP들이 타는 차는 고가거든요. 저도 조심하지만 혹시라도 다른 차가 와서 박지 않을까 늘 조마조마해요. 이제까지 딱 한 번 사고를 낸 적이 있었어요. 가벼운 접촉사고였는데 사장님이 이해해주셔서 넘어갔어요. 운전기사 하면서 교통사고를 내는 것은 ‘날 해고해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업무가 단순하게 보여도 VIP 목숨 지켜주는 일이잖아요.”

수행비서를 겸한 운전기사도 있다

회화적인 공기가 불어오는 이른 새벽. 김정길 씨는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나 도시의 무미건조와 지루를 느낀다. 거의 반년 이상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일에만 매달렸다. 5년 넘게 수행비서를 하고 있지만 이날도 출근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잠을 설쳤다.

김 씨는 6시를 막 넘기자마자 VIP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대기 중이다. 어젯밤에는 윤이 반질반질하게 나도록 이미 세차도 끝낸 상태다.

김 씨는 하루 업무를 묻는 나에게 대뜸 “VIP는 단 하루도 제 시간에 출근하지 않은 적이 없다.”면서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비싼 대가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의 얘기를 듣고 이상하게도 마음이 허전해졌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VIP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오너에 대한 예의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의 재력이나 힘 때문일까. 이런 얘기가 나오면 왠지 나는 세상과 한없이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아 지치고 서먹서먹해진다.

김 씨의 말처럼 VIP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경호원과 함께 칼같이 대문을 열고 나왔다. 김 씨는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자동차 뒷문을 열었다. 경호원은 김 씨와 서로 목례를 한 뒤 조수석에 탔다.

김 씨는 가로등이 채 꺼지지 않은 도로를 달렸다. 차창 너머로 태양이 어슴푸레 고개를 들며 금속성 빛깔을 잘게 부수고 있었다.

“운전은 그냥 운전이 아닙니다. 가장 안전하고 빠르게 해야 합니다. 틈만 나면 차량 점검하고, 만약 약속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시간을 지키는 게 기본입니다. 정말 목숨 걸고 갑니다.”

김 씨는 운전기사뿐만 아니라 VIP의 스케줄도 관리한다. 일주일 동안 예약된 미팅이나 회의 시간, 그때그때 발생하는 업무 스케줄까지 모두 체크하고 줄줄 왼다. VIP가 갑작스럽게 스케줄이 비는 시간을 물어도 바로 대답할 수 있을 정도다. 어떤 경우에는 VIP의 업무처리도 대신한다. 그래서 신중하고 조심해야 할 것들이 많다.

“수행비서를 하다 보면 회사의 기밀 사항을 알게 됩니다. 비밀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철저하게 지켜야 합니다. VIP의 사생활을 누설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요. 이런 마음가짐이 없으면 수행비서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중역들도 함부로 못하는 운전기사

도심을 미끄러지듯이 달린 승용차가 높다란 빌딩 앞에 도착했다. 중요한 회의가 있는지 중역들도 모두 같은 시간대에 줄줄이 나타났다. 어느 누구도 늦는 사람이 없었다. 오랜만에 조직이란 게 무엇인지, 그 맛을 느껴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의 얼굴 표정에서는 스스로 운명을 극복한 사람처럼 당당하고 멋스러운 풍미가 가득했다.

VIP를 따라나서던 김 씨는 중역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중역들도 가볍게 답례했다. 딱딱한 인사치레는 아니었다. 부드럽고 생명력이 있는 인사였다.

“예전에는 가급적이면 중역들과 대화를 못하게 했었어요. 저보다 VIP의 사생활을 많이 아는 사람이 없잖아요. 하지만 3년 정도 지나면서부터는 전혀 개의치 않아요. 실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거죠. 중역들도 존댓말 딱딱 써줍니다.”

이런 김 씨에게도 답답한 마음은 있다. 개인적인 시간이 거의 없는 데다 대기 시간이 길어질 때면 심심하고 지루해서다. 하지만 그는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그냥 편하게 생각한다.

“공상을 줄여요. VIP랑 항상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요. 그러면 지루함이 금방 사라져요. 그 대신 연봉은 많아요.(웃음) 별도로 얻는 수입도 종종 생기고요. 품위 유지비, 식사비, 상품권, 뭐 다양합니다.”

김 씨가 1년에 쉬는 날은 고작 1주일 정도. 보통 그런 날은 VIP가 아픈 날이다. 작년에는 3일도 쉬지 못했다.

운전기사도 여러 가지

김 씨는 신입사원 공채로 입사해 첫 회사생활을 비서실에서 시작했고, 몇 년 뒤 수행비서로 발탁돼 운전기사를 겸하게 됐다. 하지만 김 씨와 같이 운전을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통은 소개업체를 거쳐 운전기사로 취직을 한다. 파견업체에서 인력을 공급하는 형식이다. 이처럼 업체를 통해 운전대를 잡으면 1~2년을 기준으로 계약을 하며, 임금도 그리 많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이가 어릴수록 채용이 안 될 때도 있다. 운전경력도 5년 이상, 무사고운전은 필수다. 현재 소개업체 수수료는 연봉의 2% 정도. 어떤 곳은 3%까지 받는다.

이순철 씨는 은행에서 업무용 차량을 운전한다. 경력은 5년이며, 두 번째 직장이다. 이 씨의 고향은 전라도다. 첫 직장은 중소기업 VIP 운전기사였는데, 서울 지리를 몰라 애를 먹었다. 하지만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가끔 모르는 길을 가게 되면 VIP에게 묻기도 했다. VIP는 마냥 어렵게만 대하지 않는 이 씨가 친근하게 느껴져 길도 잘 알려주고, 챙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씨는 운전을 시작하면서 회의가 찾아오는 일이 많았다.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어 끝내 일을 그만뒀다. 하지만 몇 달 뒤 다시 운전기사가 됐다. 특별한 기술도 없고, 나이가 많아 번번이 직장을 구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운전기사를 하면서 돈을 모아 사업을 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VIP가 골프장이나 식당에 가면 운전기사들끼리 만나요. 기사대기실이 있는 곳도 있고요. 거기에서 얘기 많이 들어요. 일자리를 주고 받는 경우도 있고요. ‘어디는 연봉이 얼마다’, ‘어디가 일하기 편하다’ 이런 얘기도 많이 합니다. 대기업이 비교적 괜찮다는 평이에요. 급여도 높고요. 근데 저 같은 경우는 생각이 달라요. 대기업은 개인적인 시간이 전혀 없기 때문에 급여가 적어도 중소기업이 나아요. 대기업은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이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씨는 “요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운전기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이를 악용하는 소개업체들이 많다.”고 걱정이다. 가입비만 챙겨 먹고 구인구직 활동을 도와주지 않거나, 회원들이 이를 거세게 항의하면 전화번호를 바꾸고 사무실을 이전해버린다는 것. 그래서 그는 “운전기사를 하려면 구인구직 사이트나 업체를 이용하는 것보다 전문 파견업체에 문의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운전기사는 노예가 아니다

VIP를 수행하는 운전기사들은 집안의 갖가지 애경사에 참석하기가 쉽지 않다. 박기범 씨도 운전기사를 하면서 중요한 집안행사에 빠지는 경우가 많아 집안 어르신들에게 종종 눈총을 받았다.

“VIP의 스케줄을 맞추다 보면 친척 어른신이 돌아가셔도, 조카가 결혼해도 못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직계 가족의 경우는 잘 얘기하면 갈 수 있는데, 그것마저도 쉽지 않을 때가 있죠. 정말 중요한 일정이 있는데, VIP 혼자 놔두고 갈 수 없지 않습니까. 별도로 수행기사, 경호원들이 있는 경우에는 대신 운전을 해주기도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기업 VIP뿐만 아니라 부자들도 운전기사를 고용한다. 이들 중에는 차도 좋고, 돈도 후하게 주는 기분파들도 많지만 성격이 폭력적인 사람들도 가끔 있다.

“저는 운이 좋아서 그런지 그런 일이 없었지만 모욕적인 대우를 당하는 운전기사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대놓고 무시하거나 욕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기사들 모여서 얘기해보면 인간이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기사도 있어요. VIP 성격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고요. 또 운전만 하는 게 아니라 심부름도 시키고, 잡일도 다 시키고... 그 정도가 되면 운전기사가 아니라 노예죠, 노예. 아무리 고용하는 입장이라고 해도 최소한 인격적인 대우는 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박기범 씨는 운전이 지루하고 하기 싫을 때도 있지만 계속할 예정이다. 자기를 믿어주는 만큼 신의를 지키고 싶다는 것. 송사리 떼처럼 줏대 없이 좋은 것만 뒤따라 다니는 현대인들이 한 번 정도는 생각해볼 만한 말이다.

사기당할 수도 있어요

수행기사를 알아보기 전에 채용 대행 업체가 허가된 업체인지 확인하세요. 사업허가를 받은 업체라야 믿을 수 있거든요. 하지만 상담원이 정식 등록된 사람인지 확인해보세요. 그렇지 않으면 수수료를 떼일 수 있어요. 또 수수료를 낸 뒤에는 꼭 영수증을 받으세요. 은행을 통해 입금하시면 내역이 남기 때문에 더욱 안전해요.

골프장이 좋아요

수행기사들은 골프장을 좋아했어요. 상큼한 공기를 마시면서 4시간 넘게 쉴 수 있기 때문이에요. 마음도 더없이 고요해지고 평온해져 답답한 도시에서 대기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겠죠. 반면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곳은 술집이에요. 이날은 자정이 기본이거든요.

별스러운 VIP

운전기사 이순철 씨는 황당한 VIP 때문에 직장을 옮긴 적이 있어요. “길을 잘 몰라서 물어봤는데 짜증을 내시더라고요. 제가 처음 가는 식당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렇게 가면 된다고 말해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요? VIP들이 너무 권위적으로 대할 때는 정말 숨이 턱턱 막힌다니까요.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어요. 전화로 음성을 높여서 막 싸우다가 저한테 상스러운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제가 아무리 운전기사라고 해도 그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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