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아노동자 박덕제. ⓒ뉴스Q

1. 기아자동차 노동조합 설립 및 전개 과정

기아 노조는 1960년 8월 20일 당시 대한노총 산하 ‘기아산업 노동조합결성준비위원회’의 발족에서 그 시발을 찾을 수 있다. 4·19혁명 이후 제2공화국의 노동권 보호 방침에 따라 한 달여의 준비과정을 거쳐 1960년 9월 20일 노동조합이 결성된다.

당시 노조의 명칭은 회사명을 그대로 반영한 ‘기아산업 노동조합(대한노총 가맹)’으로 기업별노동조합이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의해 노조가 해체되었다가, 같은 해 8월 3일 「사회단체 등록에 관한 법률 중 개정법률」과 「근로자의 단체 활동에 관한 법률」에 의해 10월 24일 노조가 다시 결성되었다.

이날을 기아자동차 노조창립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당시 노조는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조직지침에 의거하여 유사(類似) 산업별 조합 체제가 강요되었기 때문에 기아 노조의 명칭은 ‘전국금속노동조합 00지역지부 기아산업분회’로 변경되었다. 형식상으로는 「산업별 노동조합-지역지부」 체제였지만 본질적으로는 분회의 조합원은 기아종업원만으로 구성된 기업별노동조합이었다.

조직의 성장과 더불어 73년 12월 분회에서 지부로 승격이 되고 형식적으로 기업별 노동조합 체계로 다시 전환된 것은 노동조합법의 개정이 이루어진 81년 이후였다. 1994년 6월 상급단체이면서 파행적인 조직운영을 해온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1995년 11월 임시 조합원 총회를 통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산하 전국자동차산업 노동조합연맹 기아자동차노동조합으로 상급단체명을 명기하였다.

1998년 2월 금속 3조직(자동차연맹, 민주금속연맹,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맹)이 연맹의 대산별 원칙에 따라 통합되면서 상급단체가 민주노총 전국금속산업연맹으로 조직을 운영하였다. 1999년 기아자동차 4사(기아자동차, 아시아자동차, 기아차판매, 기아서비스) 노동조합이 통합, 그 후 기업별노조를 유지하였다.

2001년 9월 처음으로 통합선거를 통해 16대 통합집행부가 만들어졌으며 2005년 4월 18대 집행부가 들어섰다. 2006년 6월 산별전환 총회가 가결됨에 따라 지난 9년간의 금속연맹 시대를 마감하고 조직 명칭을 전국 금속산업 노동조합 총연맹에서 전국금속노동조합으로 변경하였다.

2007년 1월 산별시대와 더불어 1사1노조를 진행하였다. 10년이 지난 2017년 4월 ‘사내하청분회 분리 총회’를 강행하여 1사1노조 시대를 마감하였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은 1960년 9월 20일 설립되어 약 57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노동조합으로 우리나라 자동차산업계 노동조합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표 1-1> 기아자동차 노동조합 현황

설립일자 1960년 9월 20일
상급단체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
노조가입형태 Union Shop + Open Shop
조합원수 31,081명(2015년 10월 기준)
대의원수 472명
집행부 임기 2년
조합비 공제율 통상급 1.2%
전임인원 유급 18명, 무급 96명
조합구성 5개 지회
평균 근속연수 19.6년(2016년 1월 기준)

※출처 : 기아자동차 지부 홈페이지

2. 노조창립에서 84년 말까지(노동운동의 암흑기)

기아치 노동운동사에서 노조 창립에서 1980년 초까지를 소위 노동운동의 암흑기라 부른다. 현장 활동이 시작하게 된 배경은 1980년대 중반 소위 ‘위장취업자’가 노동현장에 들어와 노동자에 대한 차별적이고 비인간적인 대우라는 토양 속에서 자본에 저항하며 탄생하게 된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은 군사독재 정권이었고 노동조합은 노무관리를 대행하는 수준이었다. 봉고신화로 회사는 급속 팽창하였으며 억압적 노무관리를 유지하였다. 조합원은 사측에 불만은 많으나 숨죽여 지내는 시기였다.

3. 노동운동의 준비기(84년 ~ 90년 이전)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부터 기아자동차 현장에서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85년 이0신, 정0기 최초 현장 유인물 배포) 그러던 중 1987년 이후 현장분위기는 급변하게 된다.

1987년 4월 27일 12시 노동자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모여 들었는데, 그동안 목소리를 죽이고 있었던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와 선진 노동자들이 사회적 변동 시기에 더 이상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문제의식 하에 ‘근로조건 개선’과 함께 회사의 노무관리 역할을 집행부를 강하게 비판하며 식탁 위에 올라가 기습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식판 대투쟁’이라는 이 사건은 기아자동차 노조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정0기, 조0호 주도) 이 사건에 참여했다 해고가 된 정형기 등이 1987년 7월 집행유예로 석방되면서 현장 내에서는 자생적인 학습모임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노동조합 민주화를 위한 홍보작업이 시작되었다.

1988년에 들어서면서 노조 위원장 직선제를 요구하는 투쟁이 비공인 파업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파업 돌입 하루 만에 1981년부터 7년여 동안 노조 집행부를 장악해 온 8대 김세민 위원장이 ‘위원장 직선제 선출’ 요구에 굴복하고 사퇴함에 따라 기아차 노조의 새로운 시기가 열리게 되었다.

김세민 집행부가 사퇴하면서 노동조합 최초로 직선제에 의한 위원장 선거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1988년 9월 임원선거는 지역 향우회(호남향우회, 경우회, 충우회) 간 대항전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결국 충우회 출신의 유호영 후보가 당선이 된다.

유호영 9대 집행부는 이전 집행부와는 달리 조합활동의 공개성과 민주적 절차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하면, 1988년 임금협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재협상을 추진하여 추가적인 임금인상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집행부 반대에 있는 89년 2월 활동가들을 해고하였다.(조0호, 정0기, 배0정) 이들은 ‘기아 해복투’를 만들어 매일 출근선전전과 복직투쟁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7월 ‘특근조작사건’으로 해고되었던 이종대 대의원이 해고가 된 것과 관련해 ‘노조가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고 노조에 항의하면서 분신을 하였다.

이종대 대의원의 분신 이후 투병 중에 대중적인 투쟁을 준비하였으나 지도부의 회피로 무산되었다. 이종대 대의원의 유서는 “나를 끝으로 더 이상의 해고자가 없도록 하고, 내 죽음을 물질로 합의하지 말라. 책임자 처벌과 조합장으로 장례를 치러달라.”는 것이었다. 이종대 열사의 죽음은 이후 기아자동차 노조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이 여파로 최초의 직선제에 의해 선출된 9대 유호영 집행부는 불신임 투표가 제기돼 1년여 만에 중도하차하게 되었다. 기아 해복투와 이종대 열사의 죽음은 기아노동운동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현장조직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차 례]
1. 기아자동차 노동조합 설립 및 전개과정
2. 노조창립에서 84년 말까지(노동운동의 암흑기)
3. 노동운동의 준비기(84년 ~ 90년 이전)

4. 노동운동의 탄생기(90년 ~ 96년 이전)
5. 이념적 분화기(1996년 ~ 2003년)
6. 권력 지향적 분화기(2003년 ~ 2012년)
7. 권력 지향적 통합기(2012년 이후 ~ 현재)
8. 기아자동차 노동운동의 특징
9. 기아자동차 노동운동의 과제와 방향     

 

기아노동자 박덕제

전 민주노동당 화성시위원회 위원장
전 금속노동조합 기아자동차지부 정책실장

     
*<뉴스Q>에서는 글의 분량이 너무 많아 조금씩 나누어, 앞으로 4주에 걸쳐 아래와 같이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1주차: 7월 31일(월) [차례 1, 2, 3]
2주차: 8월 7일(월) [차례 4, 5]
3주차: 8월 14일(월) [차례 6, 7]
4주차: 8월 21일(월) [차례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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