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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삶의 희망을 팔아요트럭 노점상-길따라 물건 파는 사람들
이동권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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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22  13: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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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삶의 현장과 마주치면
한층 더 겸손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집으로 가는 길, 이 가슴이 훈훈해지는 이유도
당차게 살아가는 우리이웃의 노고 때문이리라.

물질문명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더 높은 곳을 향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산다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우리이웃의 평화를 깨버리거나 이뤄질 수 없는 헛된 욕망으로 괴로워한다면, 그러한 노력은 깊은 슬픔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우리는 얼마나 잘살아야 하고, 얼마나 많이 가져야 하는가. 절망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 화장품 트럭 노점상을 운영하는 김종숙 씨. ⓒ이동권

날씨가 많이 차가워졌다. 수다를 떠는 여학생들만이 활달하게 장난을 치며 걸어 다닐 뿐, 어깨를 잔뜩 움츠린 어른들은 길을 물어도 못 들은 척 상대도 해주지 않을 표정이다.

서서히 무릎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비까지 내렸다. 잠시 내리다 그칠 비가 아니었다. 점점 옷이 축축해지자 자연스럽게 입가가 실쭉해졌다. 트럭 짐칸에 야채나 과일, 생선, 화장품 등을 싣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돌아다니는 행상들을 만나기 위해 하루 종일 걸은 탓이다.

첫날, 정말 많이 걸었다. 집에 들어와 간신히 차 한 잔을 마시고 바로 잠자리에 누워야 할 정도로 피곤이 엄습했다. 그럼에도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기에, 다른 때와 달리 조금도 신나지 않았다. 다음 날 또 길거리를 헤맬 생각을 하니 입이 바싹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이튿날은 식사부터 서둘렀다. 담백한 게살이나 홍합국을 파는 트럭에서 소주 한 잔 들이켤 요량으로 저녁 식사를 미루다 더욱 기운이 빠졌기 때문이다.

번화가를 이 잡듯이 뒤졌다. 하지만 거리에는 포장마차와 노점상만 넘쳐날 뿐이었다. 멀리서 어렴풋이 빛나는 헤드라이트를 쫓아가 봐도 온갖 물건을 배달하는 트럭이었다.

밤 10시가 가까워지자 대도시 한복판에서는 트럭 노점상을 절대로 만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주택 밀집지역이나 아파트 단지 등 동네 상권이 형성되어 있는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짐칸에 포장을 치고 물건을 진열해놓은 트럭 노점상을 만날 수 있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달려갔다.

추운 날씨에도 트럭 노점상들은 길가에 차를 대놓고 묵묵하게 자리를 지켰다. 대부분 사람들은 진열된 물건이나 음식을 흘깃 쳐다보며 지나칠 뿐, 거래가 성사되는 모습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가끔 단골손님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새로 들어온 물건은 무엇이며, 가격은 어느 정도인지 묻고는 갈 길을 재촉할 따름이었다.

한동안 장사가 여의치 않으면, 트럭 주인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길게 담배를 몰아 피면서 모자가 달린 방한점퍼의 옷깃을 여미었다. 이러한 모습에는 고독과 침울함이 뻗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시대의 조류에 관계없이 성실하고 우직하게 살아가는 순박한 우리이웃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에 부딪치더라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왠지 모를 용기를 얻는다.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메이크업 베이스 하나 주세요.”

젊은 여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장품 노점상 주인은 P사의 제품을 꺼내 괜찮은 물건이니 한번 써보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따로 쓰는 메이커가 있었는지 나중에 들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피부가 거칠어졌다고 푸념을 늘어놓는 손님은 주인장이 꺼내준 화장품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고, 파마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손님은 아무 말도 없이 짐칸에 실린 화장품들을 한번 쭉 훑어보며 지나갔다.

화장품 트럭은 다른 노점과는 다르게 여심(女心)을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짐칸을 꽃으로 장식하고, 나무 액자도 걸어 놓았다. 또 층을 비스듬하게 만들어 화장품이 잘 보이도록 신경을 썼다. 아기자기한 화장품 용기들이 트럭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우아하고 고상한 자태로 여인들의 발길을 유혹했다. 화장품 트럭은 가뿐하고 상큼한 여름을 입은 여인 같다.

김종숙 씨는 트럭으로 장사를 시작한 지 9년 됐다. 남자도 하기 힘들다는 트럭 행상을 시작한 것은 어쩌면 IMF가 준 기회 아닌 기회.

원래 김 씨는 종로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다방을 경영했던 사장. 그녀는 14년 동안 운영한 이 다방을 그만두고 수락산 입구에서 마늘 까는 반지를 팔았다. 당시 대도시의 다방은 새로운 패턴의 인테리어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커피숍이나 카페들이 등장하면서 점점 손님이 끊기기 시작해, 그녀도 어쩔 수 없이 문을 닫고 노점상으로 전업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변신은 대성공이었다.

“시골 다녀오는 길에 마늘 까는 반지를 파는 아저씨를 봤습니다. 이 반지를 팔면 돈을 벌 수 있겠다는 느낌이 오더라고요. 그 아저씨에게 장사하는 법을 배워 반지와 마늘 한 망을 들고 수락산으로 향했습니다. 정말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하루에 15만 원 이상을 벌었거든요.”

돈 맛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늘 까는 반지를 파는 사람이 늘어난 데다, IMF가 터져버린 것.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다른 일을 찾아봐야 했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무조건 3천 원’에 판매하는 화장품을 보고 또 이거다 싶어 화장품 장사에 뛰어 들었다. 처음에 운전한 차는 타우. 또 대박이었다. IMF 시절 대다수의 서민들은 무척 힘들었지만, 그녀는 돈을 벌었다. 성공의 비밀은 가장 바닥으로 내려가서 장사를 했기 때문이다.

“화장품을 팔아본 적이 없어 잘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일단 30만 원을 주고 구입한 화장품을 타우에 싣고 다니면서 팔았습니다. 정말 난리가 났죠. 6년 전까지는 잘나갔습니다. 근데, 저가 화장품이 등장하면서 다시 판로가 막히기 시작했습니다. 생각 끝에 메이커 화장품으로 방향을 선회했죠. 그 당시 20여 대의 화장품 행상이 있었는데, 지금은 4대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김 씨는 이렇게 번 돈으로 아들을 가르치고, 집도 장만했다. 현재도 큰돈은 벌지 못하지만, 소소하게 생활은 유지할만하다. 김 씨는 20년 넘게 홀로 일하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지만,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일했다.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늘 까는 반지나 3천 원짜리 화장품처럼 언젠가는 그런 아이템이 또 나타날 것입니다. 어느 순간 장사가 안 된다고 해서 접으면 안 됩니다. 항상 뭔가에 몰두하면 반드시 기회는 찾아옵니다. 남들이 한다고 해서 이것저것 덤비지 말고 한 가지를 선택해 매진하세요. 자신의 판단을 믿으세요. 남들 다 죽는다고 해도 경기가 어려울 때 가장 잘되는 게 트럭 노점입니다. 혹 장사가 안되면 아이템이 잘못된 게 아닌지, 물건이 나쁘지 않은지 생각하고요.”

김 씨는 ‘몸이 허락하는 한 트럭 노점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가게를 얻을 수도 있지만, 트럭 장사가 매력이 대단하다는 것. 그녀는 “트럭 장사는 단속 때문에 쫓겨 다니거나 서러운 일을 당하는 것만 감수하면 인건비나 임대료 등을 아낄 수 있고 또 개인적인 일이 있을 때 쉴 수 있다.”고 말했다.

   
▲ 야채를 파는 트럭 노점상. ⓒ이동권

젊은이들이 한심해

비가 내릴 모양인지 세찬 바람이 한차례 불어왔다. 도시를 밝히는 가로등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겨울비를 재촉하고 이파리가 다 떨어진 나무들이 홀쭉한 엉겅퀴 줄기처럼 쓸쓸하게 뻗어 올라 황량한 도시를 연출했다.

밤 9시. 간식을 먹으면서 가족들과 따뜻한 정을 나눌 시간. 음식을 파는 트럭 노점상은 이 시간이 절정이다. 수요도 많은 편이어서 트럭 노점 중에는 먹을거리 장사가 가장 많다. 오뎅이나 붕어빵을 비롯해 과일, 통닭, 만두, 순대 등 종류도 다양하다.

아파트 초입에서 식당에서나 맛볼 수 있는 색다른 먹을거리를 파는 노점상이 눈에 띄었다. 세발낙지들은 기포들이 제멋대로 부풀어 오른 플라스틱 대야에서 살아 움직였고, 진열대에는 생굴, 참전복회, 전어회 등이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 하지만 트럭 노점은 챙길 일이 많다. 해물들을 싱싱하게 보관하기 위해서는 기포기와 깨끗한 바닷물 등 여러 가지가 필수적으로 따라다닌다. 죽어버리면 제 값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예민하고 신중할 수밖에 없다.

사업이 수월치 않아 장사를 시작한 김 씨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털어놓지 못했다. 얘기해봤자 자기 마음도 좋지 않고 자식들 마음도 아프다는 것. 그래서 그는 얼굴이 공개되는 것도, 이름을 밝히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김 씨뿐만 아니라 트럭 노점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다. 예전처럼 특별하게 천대받는 사람은 없었지만, 스스로 위축돼 사는 것이다. 또 격랑 같은 세상사에 휩쓸리면서 살아온 인생, 언론에 나갔다가 무슨 낭패라도 보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만만치 않았다.

김 씨는 “단돈 만 원이라도 벌려고 이렇게 나오는데, 힘들다.”며 땀 흘리는 노동을 무조건 싫어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한심하다.”면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젊은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작은 구멍가게 앞에서 할아버지가 통닭을 팔고 있었다. 먹고살기 어려워 시작한 일에 체면이 무슨 소용이랴. 동네 사람들의 눈총에도 아랑곳없이 길거리에서 닭을 판다. 할아버지는 빙글빙글 돌면서 누렇게 익어가는 닭을 바라보며 “경기가 좋지 않다.”고 한숨부터 던진다.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평생을 밝은 웃음으로 변용하며 살아온 사람처럼 주름마다 미소가 가득하다.

할아버지에게 닭 한 마리 먹고 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괜찮다.”며 냉큼 구멍가게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2평 남짓한 가게에는 다리가 불편한 한 할머니가 있었다. 작은 문턱에라도 걸려 넘어지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할머니는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를 비워주며 앉으라고 권했다. 괜히 할머니의 자리를 빼앗은 게 아닌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작은 홀에는 벌써 손님 2명이 어깨를 맞대고 붙어 앉아 통닭을 먹고 있다.

노릇하게 익은 닭살을 뜯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호프집이나 전문 통닭집의 맛과는 달랐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맛보는 흥분까지 겹쳐 특유의 감칠맛이 느껴졌다.

“요즘 많이 팔려요?”
“안 팔려.”
“왜 길거리에서 통닭을 파세요? 주민들이 신고 안 해요?”
“노인네들이 먹고살라고 하는데 신고하겄어? 그럼 사람도 아니제.”

단어 끝을 길게 빼는 지방 사투리였다. 이 말투는 말끝에서 배어나오는 웃음과 기묘하게 범벅이 돼 포근한 시골 정서를 느끼게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통닭 할아버지와 구멍가게 할머니는 부부였다.

   
▲ 이승복 씨의 과일 트럭. ⓒ이동권

집세도 못 낼 지경이야

길을 걷다 두 갈래 혹은 세 갈래의 길을 만났다. 어디로 가야 트럭 노점상을 만날 수 있을까. 해답은 없다. 나는 불빛이 환한 곳으로 무작정 향했다.

아파트 초입에 있는 공원 앞. 허연 열기를 내뿜으면서 정적을 깨는 뻥튀기 소리가 들려왔다. ‘튀밥’만 보면 어렸을 적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뻥이요’라고 소리치던 구레나룻 아저씨가 떠오른다. ‘뻥’소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두 손을 모으게 한 뒤 튀밥을 쥐여주던 그 아저씨. 이제는 뻥튀기 기술도 발달해 눈앞에서 바로바로 만들어져 나온다. 세월이 초로와 같다는 말이 맞나 보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비닐봉지에 뻥튀기를 주워 담는 주인에게 말을 붙였다. 그러나 그는 경계하는 표정으로 ‘저리 가라’고 말했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인터뷰를 거절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트럭 주인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거뭇거뭇 수염을 기르고, 유독 눈 아래 주름이 깊게 패어 있다. 방한모를 쓰고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찢어지는 밤바람을 이겨내면서 진한 입김을 토해낼 뿐. 무슨 사연이 있는지, 세상과는 의절한 듯하다. 아마도 힘겨운 일상이 준 혹독한 생존본능일지 모른다.

“참 신기하네요. 이렇게 만들어지는 건 처음 봐요. 언제부터 하셨어요?”
“5년 됐어.”

그가 말문을 열었다. 좀 전에 빳빳하게 얼어붙어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건강은 어떠냐, 먹고살만하느냐고 물어도 반응이 없다. 결국 그는 이 말 한마디만을 남겼다. “집세도 못 낼 지경이야. 살기 힘드니까 물어보지 마.”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삶을 꿰뚫고 지나가는 힘겨움 앞에서 더 이상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신도림, 구로에서 서교동, 연희동을 지나 서울역, 만리동…….

트럭에서 팔아도 물건은 괜찮아

은빛 생선들이 희미한 불빛에 반짝였다. 등 푸른 생선들도 검은 눈동자를 크게 뜬 채 싱싱함을 발하고, 이름도 모르는 갖가지 물고기들이 나무상자에 담겨 손님을 기다렸다. 추운 날씨 탓에 머리는 지근거리고 다리의 힘도 풀렸다. 하지만 사진을 찍으라며 대머리처럼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물고기들을 보기 좋게 진열해주는 트럭 주인의 배려에 피곤함은 단번에 사라져버렸다.

트럭 주인은 “트럭에서 판다고 좋은 생선이 아니라는 법 있느냐?”면서 “수산시장에서 소량을 가져와 직접 팔기 때문에 신선하고 맛도 좋다.”고 말했다. 노점에서 판다고 우습게 보지 말라는 것. 그는 “장사가 안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물건까지 나쁘다는 선입견은 버렸으면 좋겠다.”면서 ‘생선을 한번 보라’며 생선을 일일이 뒤집었다.

눈앞으로 허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어른 얼굴만 한 대게와 불그스름한 홍게, 오징어 몸통에 여러 가지 야채와 고기를 넣어 만든 오징어순대를 팔고 있었다. 노상에서 게살을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한껏 부풀었다. 그러나 포장만 됐다. 나는 먹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하고 입맛만 다셔야 했다.

그도 장사가 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1만 원이면 홍게 3마리나 오징어순대 3마리를 살 수 있지만, 쉽게 지갑을 열지 않는다는 것. 그는 “작년에 비하면 매상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면서 ‘계속해서 이 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 생선을 파는 트럭 노점상. ⓒ이동권

끝까지 몰렸어요

마을버스 정류장 앞. 대여섯 명이 내렸다. 도시인들의 얼굴은 언제나 변함없이 굳어 있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되는 사람처럼 옆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집으로 향했다. 시골 정류장에서는 누구나 이웃이요, 친구가 된다. 행여나 아는 사람을 만나면 자식 걱정, 집안 걱정에 얘기는 끝이 없다. 탁 트인 들판과 신선한 공기는 사람의 마음에도 소박한 여유를 주는가 보다.

라디오를 켜놓고 과일을 파는 트럭 주인은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봤다. 하루 매상이 영 시원치 않았는지 표정이 어둡다. 나는 옆에 서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를 지켜보았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사라지자 그는 다시 꼿꼿한 자세로 서서 눈을 감고 담배를 꺼내 문다. 긴 목을 끌어당기며 끊임없이 밀려오는 울화를 다스린다. 이 상태로 더 가다 보면 혀끝이라도 깨물어버릴 것 같다.

귤, 바나나 등 과일을 싣고 다니는 이승복 씨. 그는 트럭 노점을 시작한 지 6년 됐다. 사업에 실패한 뒤 바나나 장사부터 시작했고, 계속 과일만 팔고 있다.

“처음 트럭 노점을 했을 때는 하루에 바나나 25상자를 팔았어요. 3년 전만 해도 귤은 20~30상자를 팔았고요. 지금은 10상자를 3일에 팔아요. 기본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모든 게 궁지에 몰려 있어요. 이 바닥에서 잔뼈 굵은 사람들도 많이 그만둔 상태예요. 그렇다고 집에 앉아 있을 수도 없고. 하루 경비가 못해도 1만 원은 써지는데 남는 게 없죠.”

이 씨의 하루 용돈은 1만 원이다. 트럭에 가스를 넣고, 점심을 먹고, 커피 한두 잔 마시고 담배를 사면 그만이다. 과일을 팔아 돈을 벌어도 하루 용돈을 빼고 나면 별 볼일이 없다. 물건 값도 안 나올 지경이다.

“서민들이 돈이 없어요. 한 바구니에 3천 원인데도 비싸다고 사지 않아요. 이 정도 가격이면 가족과 함께 간식으로 먹을 수 있는 돈이에요. 돈 쓰기가 무서운 거죠. 또 한미 FTA인가 뭔가 때문인지 제주도에서 귤나무가 많이 없어졌나 봐요. 귤 값도 너무 비싸요. 예전 같았으면 양도 많고 싼 과일인데, 과일 값이 전반적으로 비싸져서 먹고 싶어도 쉽게 사겠다는 생각을 못하죠.”

이 씨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짜릿한 욕은 없었지만, 열심히 사는 서민들이 더욱 어려워져야 하는 현실이 못마땅한 것이다. 또한 이 지경까지 경제를 몰고 간 것도 모자라 한미 FTA를 체결한 정부에 대한 성토도 담겨 있었다. 그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지 않았을 뿐 천지가 울음으로 넘쳐 메아리치는 듯했다.

“같은 곳을 계속 다니다 보면 외상도 주고, 좋은 물건을 떼다 파니까 손님들 반응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제 끝까지 몰렸어요. 택시기사 친구들이 택시 운전은 막판이라며 하지 말라고 했는데 좀 노력하면 월 80만 원은 번다고 들었어요. 저는 뭐냐고요.”

이 씨의 막내아들은 얼마 전 자진해서 군대에 갔다. 생활도 어렵고, 학자금을 대는 일도 쉽지 않아서다. 하지만 이 씨는 벌써부터 걱정이다. 제대하면 아들 공부라도 시켜야 할 텐데 이 정도의 돈벌이로는 힘들다는 것.

이 씨는 아침 8시에 나와서 과일을 싣고 다니다 밤에는 지하철역이나 주택가 인근으로 장소를 옮긴다. 조금이라도 더 팔기 위해 좋은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늦은 밤에 장사를 하다 보면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난다. 약자로 보이는 트럭 노점상들에게 불법을 빌미로 자기 화풀이를 하는 것이다.

“장사한다고 시비 걸고, 사진 찍어서 고발한다고 협박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약한 사람 건들지 말라고 얘기하죠. 실제로 신고하는 사람들은 없었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대형 빌딩 아래로 몸을 숨겼다. 습한 날씨가 눅눅한 바람을 만든다. 컴컴한 하늘을 바라보니 갑자기 한 아주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오랜만에 노상에서 칼국수를 말아 파는 단골집에 들러 소주를 한 잔 곁들였다. 왜 자주 오지 않느냐는 말에 바쁘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주인도 그 마음을 아는지 순대도 서비스로 내놓고, 칼국수도 곱빼기로 말아준다.

트럭 노점상을 취재하면서 쉽게 지나치고 말았던 우리이웃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가슴 깊이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좌절하지 않는 그들의 힘이 하나가 돼 사회가 돌아간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불안감과 근심은 억누를 수 없었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노점상들은 생활고로 힘들어했고, 예전보다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대화가 힘들었어요

트럭 노점상들을 많이 만났어요. 명함을 건네주고 인터뷰를 요청했죠.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팔짱도 끼고, 졸라도 봤습니다. 하지만 요지부동이었어요. 책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 심하더군요. 현재 시판되는 책들이 얼마나 민중의 삶을 외면해 왔는지 느끼는 순간이었어요.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으면 달랐을 거예요. 아마도.

가게 주인과의 관계 중요해요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기 때문에 가게 주인들과의 관계가 중요해요. 이들의 영업을 방해해서는 안 되거든요. 서로 의가 상하지 않게 관계를 잘 맺어야 하고, 무슨 일라도 생기면 성심껏 도와줘야 일하기 편해요.

트럭 노점도 규칙이 있다

트럭 노점이 매우 불규칙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어요. 오전에 가야 할 자리도 있고 오후나 밤에 가야 할 자리도 있죠. 일주일에 한 번 들르는 곳이라도, 한자리에서 오래 장사를 하다 보면 사람들이 믿고 사게 돼요. 특히 중국산이나 저질 제품은 취급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 잊지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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